
프랑스의 위대한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명작 〈만종〉 속에서, 거칠어진 두 손으로 드넓은 대지 위에서 묵묵히 흙을 일구던 평범한 두 사람이 황혼의 노을 아래서 마침내 고개를 숙이는 그 경건한 순간, 황량한 밭 한가운데로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기도의 고요가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그들의 곁에 덩그러니 놓인 투박한 농기구와 아직 다 끝마치지 못한 남겨진 일거리는, 참된 기도가 바쁜 일상의 현장을 매몰차게 도피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분주한 일상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되돌아보는 가장 거룩한 시간일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없이 일깨워 줍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가 선포한 주기도문 깊은 묵상의 설교 역시, 우리가 주일마다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해 온 익숙한 암송의 테두리를 가차 없이 뛰어넘어, 저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친밀한 아버지라 부르고 그분의 거룩한 나라와 온전한 뜻을 내 삶의 한복판에 품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순종의 자리로 우리를 거룩하게 이끌어 갑니다.
우리의 입술은 주기도문의 가장 마지막 구절에 이를 때까지 단 한 번의 막힘도 없이 유창하게 잘 외워내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의 답답한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의 온갖 근심과 내 안의 염려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머릿속으로 성경의 문장들을 기계적으로 기억하는 일과, 그 엄숙한 진리의 문장들 앞에 내 부끄러운 자신을 벌거벗은 채 세우는 일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깊이 있는 설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영원한 나라, 그리고 그분의 온전한 뜻을 간절히 구하는 세 가지 핵심적인 간구를 통해,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기도하는 사람이 무엇을 인생의 가장 귀한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지 날카롭게 묻습니다. 주기도문을 진정으로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도의 신학적 의미를 남들에게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지식적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늘의 거룩한 뜻에 나의 부끄러운 하루를 비추어 보며 완전히 돌이키는 회개에 있습니다.
거룩 앞에 멈출 때, 사랑은 더 깊어진다
성경이 하나님은 눈이 부시도록 충만한 사랑이시라고 고백할 때, 우리의 지치고 상처 입은 영혼은 비로소 깊은 안식을 얻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분의 놀라운 사랑을 내 안에 가득한 온갖 이기적인 욕망과 허물까지 그저 아무 조건 없이 묵인하고 인정해 주는 나 ㄷ편한 호의로만 오해하여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세상의 위로는 얻을지 몰라도 성경이 말하는 진짜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는 완전히 놓쳐버리게 됩니다. 이 설교는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4장 8절을 통해 선포한 사랑의 진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두려운 ‘거룩’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슬그머니 덜어 내어 만든 값싼 감정이 아니라, 오직 눈부신 거룩하신 하나님과 깨어진 피조물이 맺는 바른 관계 안에서만 비로소 온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모세가 시내산 광야의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황급히 신발을 벗어 던졌던 극적인 장면은 바로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관계의 엄숙한 문턱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출애굽기 3장 5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 앞에서 모세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며 익숙해졌던 세상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편협한 생각이나 인간적인 욕망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 둘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신 온 세상을 창조하신 절대적인 주권자이시며, 이 지구상에 지으신 모든 만물을 지금 이 순간에도 친히 보존하시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올리는 진심 어린 경배와 감사는 그분의 절대적인 능력에 짓눌려 마지못해 억지로 바치는 씁쓸한 대가가 아니라, 피조물 된 연약한 인간이 자신을 가장 아름답게 지으신 창조자 앞에서 마땅히 찾아야 할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를 회복하는 아름다운 응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을 안다는 것이 그저 무서운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얼굴조차 바라보지 못하고 멀찍이 덜덜 떨며 서 있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멀리서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연약한 인간을 다정한 인격으로 불러주시고,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사랑으로 오래 참으며 기다리시는 따뜻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오래 참으심과 기다리심을 하나님의 무능함으로 오해해서도 결코 안 되며, 반대로 그분의 놀라운 전능하심을 사랑 없는 억압과 강요로 오해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빠진 사랑은 결국 방종과 타락으로 쉽게 흘러가고, 반대로 사랑이 완전히 빠져버린 차가운 거룩함은 딱딱한 형식주의로 굳어져 버릴 수 있다는 이 설교의 거룩한 경계는, 이 두 가지의 치명적인 극단을 함께 비추며 우리의 신앙을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이 엄숙한 거룩과 한없는 사랑은 오직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장 구체적이고 완벽하게 드러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막연한 종교적 위안이나 얻고 도망치는 소극적 태도에 머무르는 일이 아니라, 그분의 뜨거운 십자가 사랑을 인격적으로 깊이 마주하는 일입니다. 이 설교가 로마서 1장에 나타난 인간의 깊은 죄악과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거듭 돌아보게 만드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구원의 거룩한 은혜는 그저 내가 지은 끔찍한 죄의 무게를 대충 지워버리고 혼자 마음 편히 안심하는 가벼운 위로가 아니라, 죄로 인해 임할 심판의 엄중함을 뼈저리게 알면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건짐을 받는 생명의 복음입니다.
아버지라 부르는 순간, 은혜가 기도의 문을 연다
우리가 매일 주일마다 암송하는 주기도문의 첫머리는 가장 높고 위대하신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지금 내 곁에서 숨소리까지 들으며 가까이 계신 아버지를 동시에 경외함으로 부르게 만듭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고백 속에는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향한 깊은 경외심이 담겨 있고, ‘우리 아버지’라는 다정한 부름 속에는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한없는 친밀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내주하시는 성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의 도우심으로 비로소 이 놀라운 부름의 자리에 당당히 참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감히 부를 수 있다는 이 엄청난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두려운 거룩을 마음대로 잊고 살아도 된다는 값싼 허락이 아니라, 오히려 그 눈부신 거룩의 보좌 앞에 십자가의 사랑을 힘입어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하고 생생한 길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거룩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기록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는 영원한 만남의 은혜로 아름답게 풀어냅니다. 비록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희미하게 알 뿐이지만, 장차 주님의 날에 온전히 알게 되리라는 흔들리지 않는 소망은, 참된 신앙의 깊이가 단순히 머리로 채우는 성경 지식의 양만으로 결코 결정되지 않음을 우리에게 깊이 일깨워 줍니다. 기도의 골방에서 조용히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미세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시간 속에서, 하나님에 관해 머리로 아는 지식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는 생명의 삶으로 깊어져 갑니다. 혹시 내가 오늘도 기도를 그저 종교적인 의무를 채우기 위한 율법적인 수단으로만 여기며 메마르게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정직하게 돌아보는 거룩한 성찰도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 살아 있는 사귐은 특정한 거룩한 장소나 정해진 예배 시간에만 갇혀 머물지 않습니다. 이른 아침 이슬을 맞으며 하루를 힘차게 시작할 때나 복잡한 도심의 길을 홀로 걸어갈 때, 온 가족이 둘러앉은 따뜻한 식탁 앞이나 깊은 밤 잠들기 직전의 침실에서도 우리는 언제든지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어떤 기도의 응답은 눈앞에 즉각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만 비로소 주어지기도 하지만, 이 설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장 선한 때와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신다는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굳게 붙들게 합니다. 눈앞의 결과를 조급하게 얻어내기 위해 내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다그치기보다, 내 깊은 염려를 밤낮으로 들으시는 분께 내 남은 인생의 모든 짐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한없는 사랑을 듬뿍 받았다는 거룩한 사실은,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이웃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속에도 자연스럽게 깊이 스며들게 마련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당부하신 새 계명의 말씀처럼, 우리가 값없이 받은 그 놀라운 사랑은 반드시 내 곁의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구체적인 삶으로 이어져야 마땅합니다. 만약 우리가 골방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뜨겁게 마음을 열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정작 내 눈앞에 닿는 곁의 사람들에게는 쌀쌀맞게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다면, 우리는 과연 기도의 깊은 친밀함이 우리의 실제 인간관계 속에서 어떤 모양으로 열매 맺고 있는지 철저히 살펴야 합니다. 하늘 아버지께 조건 없는 사랑을 받는다는 그 벅찬 기쁨이 나 혼자만의 은밀한 위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의 이웃에게까지 풍성하게 전해질 때, 우리의 믿음은 비로소 이기적인 울타리를 넘어 세상의 빛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품고, 나라의 소망을 살아가다
이제 주기도문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며 품어야 할 삶의 중심을 새롭게 빚어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라는 간구는 단순히 글자를 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과 거룩한 권위를 내 삶의 최고 가치로 존중하겠다는 진실한 고백입니다. 나의 연약한 입술로는 그 거룩한 이름을 높이 찬양하면서도 정작 일상의 행동으로는 그 이름을 세상 앞에서 부끄럽게 만들고 욕되게 할 수 있다는 뼈아픈 진실 앞에서, 기도는 자연스럽게 깊은 회개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거룩한 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드렸던 그 뜨거운 존경과 경배가 과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어지는 나의 거친 일상의 말과 이기적인 태도 속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는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오늘날 교우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씁쓸한 다툼과 분열, 그리고 세상 속의 부정한 행위들이 결코 한 개인의 사소한 문제로 조용히 끝나지 않는다고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기에 오직 우리를 통해 그분을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세상의 기준보다 못할 때,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까지 세상의 조롱거리로 함께 난도질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겨달라고 부르짖는 기도는, 다른 사람의 불경하고 무례한 태도를 날카롭게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지금 내 말과 행동이 세상 앞에서 과연 어떤 부끄러움 없는 증언이 되고 있는지 스스로를 매섭게 살피게 만듭니다. 내가 남보다 옳다는 교만한 확신보다 하나님의 그 거룩한 이름을 내 영혼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진짜 마음이 앞설 때, 남을 향해 거칠게 내뱉던 날 선 말에도 비로소 거룩한 멈춤이 찾아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주님의 간구는 좁았던 우리의 소망의 지평을 저 영원한 천국을 향해 훨씬 더 넓게 확장해 줍니다. 이 설교에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은 뒤 죽음 뒤에야 비로소 멀리 찾아오는 추상적인 세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계신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우리 마음속에 이미 임하여 시작된 하나님의 거룩한 다스림을 뜻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저 날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과 함께 이 땅 위에 온전히 눈에 보이게 이루어질 완전한 나라를 간절히 기다리는 소망이기도 합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임한 그분의 다스림을 믿기에 오늘의 나의 어두운 생각과 이기적인 행동을 매일 단호하게 돌이키고, 아직 세상이 온전히 완성되지 않았기에 수많은 불완전한 현실 앞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으며 주님을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기록된 회개의 강력한 선포를 따라 그 하늘 나라를 깊이 바라보면, 우리의 신앙적 기다림은 결코 막연하고 나태한 기대에 머물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다스림을 간절히 구한다고 입으로는 기도하면서도, 정작 내 삶의 구체적인 영역만큼은 여전히 내 이기적인 욕망과 탐심의 지배 아래 꼭꼭 숨겨두려는 우리의 위선을 매섭게 돌아보게 만듭니다. 세상의 재물과 헛된 명예, 그리고 얽히설킨 인간관계가 나를 꽉 붙잡고 흔드는 진짜 주인이 되어 내 영혼을 옥죄고 있지는 않은지 날카롭게 살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진정한 기도는 세상에서 내 힘으로 더 많은 것을 움켜쥐고 소유하려는 탐욕스러운 바람에서 돌이켜, 이미 하나님께 거저 받은 소중한 것들을 과연 무엇을 위해 거룩하게 사용할 것인지 묻는 헌신의 자리로 우리를 완전히 옮겨 놓습니다.
기도가 끝난 자리에서 순종의 하루가 시작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님의 깊은 간구의 자리에 마침내 이르면, 기도는 우리가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서 있는 이 거친 현실을 훨씬 더 선명하고 맑은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온갖 죄악과 눈물겨운 고통, 그리고 불의가 가득 판치는 이 어두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와 뜨거운 사랑이 온전히 펼쳐지기를 간구하는 것은, 그분의 거룩한 뜻을 내 삶의 현장에서 직접 실천하려는 결단과 결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설교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참된 소망은 세상의 아픔과 책임으로부터 비겁하게 도달하기 위한 핑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스러운 세상 한복판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끝까지 사랑으로 살아갈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됩니다.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보는 참된 믿음은 결코 이 땅이 감당해야 할 거룩한 책임을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순종의 삶을 결코 인간의 나약한 결심이나 의지만에 위태롭게 맡겨두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하는 깊은 영적 연약함 속에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언제나 돕고 계신다는 사실을 위로하며 일깨워 줍니다. 기도가 턱 막히고 영혼이 메마른 날에는 내 안의 얕은 부족함과 실패만 들여다보며 자책하기보다, 주님이 우리에게 친히 가르쳐 주신 가장 완벽한 기도의 말씀으로 다시 조용히 돌아와 그 거룩한 보좌 앞에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날마다 거듭 묵상하는 일은 남들 앞에 번지르르한 완벽한 기도자가 되기 위한 율법적 훈련이 아니라, 세상 물결에 밀려 매일 비틀거리는 연약한 내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거룩한 마음과 다시 정확하게 맞추는 생명의 작업입니다.
내 삶의 나침반이 그 거룩한 방향을 정확히 향하게 될 때,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빛 또한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내 손에 쥔 재물과 세상의 헛된 명예는 이제 내 존재의 가치를 세상 앞에 억지로 증명하기 위해 목숨 걸고 붙들어야 할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거저 맡겨주신 소중한 선물이자 그분의 아름다운 나라를 위해 기쁘게 쓰일 거룩한 재료가 됩니다. 참된 안식 역시 세상의 모든 염려와 문제가 내 뜻대로 말끔히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완벽한 선하신 계획 아래 오늘을 살아가고 있으며 마침내 그분의 따뜻한 품으로 영원히 돌아간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서 자연스럽게 비롯됩니다. 내 인생의 무거운 짐을 혼자서 악착같이 지탱해야 한다는 깊은 불안 대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듬뿍 받는 존귀한 자녀로 오늘을 당당히 살아가는 깊은 신뢰가 우리의 지친 영혼에 평안히 자리 잡습니다.
기도의 긴 시간을 마치고 조용히 눈을 뜨면, 어제와 똑같이 바쁘고 지친 일상과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그대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영원한 나라, 그리고 그분의 온전한 뜻을 간절히 구한 사람에게 그 평범한 일상은 더 이상 기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헛된 시간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엄숙한 말 뒤에는 아직 우리가 한 번도 살아내지 않은 새로운 하루의 소중한 기회가 하얗게 놓여 있습니다. 오늘 내 입술이 방금 전 아버지라고 간절히 부른 그 거룩하신 분을, 나의 남은 말과 거친 선택과 이기적인 사랑의 실천도 과연 진정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하루를 가만히 돌아볼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