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올리벳대학교), 교회 갈등과 화해의 복음

장재형목사

언제나 서로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동일한 구원의 복음을 위해 나란히 어깨를 걸고 서 있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다정한 이름을 가슴을 후벼 파는 상처의 다른 말로 부르기 시작할 때, 그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 벽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가운 균열이 소리 없이 번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유대 출신의 위대한 사상가 마르틴 부버가 그의 불멸의 저서 『나와 너』를 통해 우리에게 깊이 일깨워 주듯이, 인간관계의 진정한 위기는 눈앞의 상대를 인격과 영혼을 가진 살아 숨 쉬는 인격적인 ‘너’로 바라보지 않고, 내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서둘러 판단하고 매섭게 밀어내야 할 차가운 객체나 대상으로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에 가장 깊어지게 됩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가 선포한 빌립보서 3장 17절부터 4장 9절에 이르는 깊은 영적 설교는, 바로 그 참담한 균열과 분열의 현장 앞에서 교회의 쓰라린 갈등을 참된 화해와 평화로 돌려세우는 유일한 길이 인간적인 세상의 처세술이나 얄팍한 협상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마음을 전적으로 회복하는 데 있음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 공동체 내부에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했던 아름다운 기쁨과 동역의 감격스러운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유력한 일꾼 사이의 날카롭고 심각한 불화 또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치명적인 갈등의 문제를 결코 가볍고 작게 여기어 대충 넘어가거나, 혹은 감정에 치우쳐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며 다른 쪽을 쉽게 정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십자가 중심의 영적 삶과 하늘에 소망을 둔 거룩한 시민권, 주 안에서 온전히 같은 마음을 품는 태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깊은 관용과 기도의 능력, 그리고 언제나 바른 생각을 품고 실천하는 삶의 태도를 하나의 거대한 구속사적 흐름으로 촘촘히 엮어 제시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눈앞에 벌어진 갈등의 겉모습만을 임시방편으로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아름다운 관계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인간 내면의 탐욕과 교만의 뿌리 자체를 엄숙한 복음의 거울 앞에 정직하게 세우는 영적 작업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갈등의 크기가 달라질 때

사도 바울은 본격적인 권면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성도들에게 엄숙하게 권유합니다. 이 담대한 선언은 결코 자신의 도덕적 완전함이나 영적 우월성을 세상 앞에 뻐기며 자랑하려는 오만한 선언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 온몸으로 온전히 따르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교우들이 함께 바라보자는 가장 간절한 초대입니다. 그는 비록 차디찬 로마의 감옥에 갇혀 사슬에 매여 있는 비참한 처지이면서도 입술로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으며, 극한 고난과 매를 맞는 아픔 속에서도 영혼의 기쁨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남모를 파란만장한 삶은 고상한 신학적 교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수많은 말보다 훨씬 앞서서, 십자가의 좁은 길을 묵묵히 따라 살아가는 진짜 믿음이 과연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하고 실제적인 거울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이 던지는 준엄한 영적 경고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우리의 양심을 찔러 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과 눈앞의 세속적 이익만을 앞세우며 땅의 일만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정면으로 강력하게 연결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수많은 갈등과 분쟁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거창한 신학적 신념이나 양보할 수 없는 교회 행정의 원칙처럼 포장되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박수받고 싶은 낯부끄러운 욕망, 기싸움에서 절대 지고 싶지 않은 오기,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나의 기득권과 자리를 지키려는 집착이 깊게 숨어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의 모든 분쟁을 해결하는 참된 출발점을 상대방의 사소한 허물과 잘못을 낱낱이 계산하는 데 두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거룩한 빛 앞에서 나 자신의 위선과 죄악을 완전히 부인하고 철저히 회개하는 부서짐에 둡니다.

진정한 화해는 상대방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내 주장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멋대로 붙였지만 실상은 나의 좁은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겸손에서 출발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 앞에 홀로 서게 될 때, 우리는 과연 누가 더 법적으로 옳은가 하는 세상의 법정적 판결보다 내 영혼이 지금 무엇을 악착같이 움켜쥐고 붙들고 있는지가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 거창한 주장에 하나님의 거창한 뜻이라는 포장지를 멋대로 씌워놓았지만 실상은 나의 좁아터진 자존심을 꼿꼿이 지키려 한 것은 아니었는지, 거룩한 공동체의 영적 유익을 그럴듯하게 외쳤지만 실상은 내 편을 한 명이라도 더 늘려 세력을 확장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묻게 됩니다. 놀랍게도 복음은 억울한 상황에서 상대를 먼저 힘으로 꺾어 무릎 꿇리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안에서 솟구치는 이기적인 욕망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넓은 사랑보다 훨씬 더 커져 버린 추한 지점을 먼저 똑바로 보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은 곧이어 성도들의 진정한 시민권이 이 썩어질 땅이 아니라 저 높고 찬란한 하늘에 엄히 기록되어 있음을 힘주어 선포하며, 우리의 이 연약하고 비천한 몸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처럼 영원히 변화될 찬란한 소망을 바라보게 이끕니다.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는 참된 믿음은 오늘 당장 내 가슴에 생채기를 낸 상처의 아픔을 무조건 하찮게 여겨 무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순간의 씁쓸한 상처가 내 인생의 마지막 결론이자 전부가 되도록 결코 내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벌어진 작은 승패가 내 삶의 전부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든 상대방을 꺾고 반드시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세상의 조급함과 불안에서 조금씩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교회가 세상의 온갖 거친 갈등과 분쟁을 아름답게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이유는 우리 교우들 모두가 이미 완벽하게 성숙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품고 있는 그 누구보다 크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찬란한 미래를 함께 바라보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서로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은혜

사도 바울은 본격적으로 빌립보 교회 안의 껄끄러운 갈등 문제를 끄어내어 책망하기 전에, 먼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내가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영원한 면류관”이라고 다정하고 뜨거운 애정의 호칭을 불러줍니다. 차가운 책망의 말보다 먼저 따뜻하고 진실한 사랑의 호명이 그 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눈앞의 심각한 문제를 대충 덮어두기 위한 얄팍한 부드러운 수사가 아니라, 쓰라린 갈등과 오해 때문에 그동안 깊이 잊혀져 있었던 공동체의 고귀한 본래 정체성을 따스하게 회복시키는 가장 탁월한 목회적 언어입니다. 인간은 누군가 날카롭게 정죄하고 손가락질할 때 본능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철갑을 두르고 방어하기 마련이지만, 진실하고 깊은 사랑의 품 안에서는 비로소 자신의 추한 마음을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는 거룩한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토록 따뜻한 사랑의 호명 뒤에 바울은 비로소 불화의 당사자인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이름을 한 사람씩 다정하게 부르며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간곡하게 권고합니다. 그는 결코 어느 한쪽의 편에 치우쳐 서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려고 몰아세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눈앞의 갈등을 은근슬쩍 모호하게 덮어두거나 방치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두 사람의 날 선 시선을 각자의 이기적인 주장과 억울함에서 돌이켜, 훨씬 더 깊고 안전한 공통의 자리이자 거처인 “주 안에서”라는 십자가의 은혜 안으로 단단히 돌려놓습니다. 여기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처럼 모든 사람의 성격이나 의견의 차이를 억지로 무식하게 없애버리는 획일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두 사람이 각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넓고 깊은 마음을 더욱 크게 바라봄으로써, 자기 자신의 편협한 생각을 공동체의 최종적인 기준이나 법으로 삼지 않는 성숙한 복음의 아름다운 일치입니다. 진정한 화해란 상대방의 목소리를 억지로 짓밟고 지우는 일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거룩한 거울 앞에서 서로의 이름을 다시금 소중한 형제자매의 이름으로 눈물로 읽어내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홀로 싸우는 두 사람을 방치하지 않고 “멍에를 같이한 참된 동역자”에게 이 두 여인을 사랑으로 도우라고 특별히 부탁합니다. 교회의 이 거친 갈등 문제를 당사자들만의 사적인 문제로 내버려 두지 않고, 온 공동체가 함께 그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지도록 만든 것입니다. 진정한 중재자란 이리저리 악의적인 소문을 옮겨 나르는 구경꾼이 아니라, 양쪽의 억울한 말을 마음을 다해 경청하고, 따뜻한 관용과 눈물의 기도로 화해의 대화의 자리를 기꺼이 열어주며, 그들이 다시 십자가 복음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설 수 있도록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어야 마땅합니다. 교회의 갈등 해결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남의 일처럼 평가하는 구경꾼들의 무책임한 평가가 아니라, 언제나 온 공동체의 눈물 어린 사랑과 수고를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마음을 더욱 깊게 울리는 감동은 바울이 그 다툼의 두 여인을 과거에 자신과 함께 복음의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힘썼던 소중한 동역자로 다정하게 기억하고, 그들의 귀한 이름들이 하늘의 생명책에 환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선언하는 데서 찬란하게 피어납니다. 현재 잠시 겪고 있는 이 씁쓸한 불화와 오해가 그 사람들의 인생 전부를 대변할 수 없으며, 사소한 상처가 그들이 가진 영원한 구원의 궁극적 정체성을 결코 지워버릴 수 없다는 깊은 영적 진리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무서운 붉은 깃발을 꽂고 적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면 화해의 문은 영원히 닫혀 버리지만, 우리 모두가 동일한 십자가의 은혜로 거저 구원받았고 동일한 영원한 천국 소망을 향해 함께 손을 잡고 걷는 지체임을 기억할 때, 미움은 더 이상 우리 마음속에 머물러야 할 영원한 명분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됩니다.

관용과 감사의 기도가 마음의 문을 열 때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향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외친 권면은 결코 지금 눈앞에 벌어진 심각한 갈등의 아픔을 대충 모른 척하라는 무책임한 말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지금 차디찬 로마의 감옥 깊은 곳에 갇혀 있고 자신이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안에도 매서운 불화의 바람이 불어 닥치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주어진 말씀이기에, 이 거룩한 기쁨은 세상의 문제들이 전부 말끔히 사라졌을 때 비로소 느끼는 가볍고 일시적인 감정과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저 높고 찬란한 하늘 시민권과 영원한 부활의 소망에 깊이 뿌리내린 흔들리지 않는 기쁨은, 사소한 갈등의 바람이 교회 공동체의 고귀한 정체성 전체를 한순간에 삼켜 버리지 못하도록 든든히 막아 줍니다. 복음이 주는 거룩한 기쁨을 잃어버리면 상대방이 무심코 내뱉은 사소한 말 한마디가 내 영혼의 주인 자리를 꿰차고 앉아 괴롭히지만, 오직 주 안에서 참된 기쁨을 온전히 회복할 때 쓰라린 갈등은 비로소 은혜로 치유되어야 할 일부분으로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 뒤를 이어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권면되는 온유한 관용은 세상이 말하는 무기력한 양보나 잘못을 보고도 침묵하는 비겁한 무원칙의 침묵이 아닙니다.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낄 때 당장 그 자리에서 보복하고 상대방의 영혼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육신의 거친 충동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겨내며, 온유하면서도 단호하게 진리의 선을 선택하는 거룩한 영적 능력입니다. 이 관용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는 사도의 말씀은, 참된 화해와 평화가 교회 안의 밀실에서 나누는 조용한 합의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거친 세상 한복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세상 앞에 당당히 드러내야 할 가장 찬란한 복음의 품성이어야 함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의 삶에서 갈등과 오해가 깊어지면 우리의 연약한 마음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최악의 일들까지 미리 당겨와 두려워 떨기 시작합니다. 상대방이 무심코 던진 말을 수십 번 되풀이하여 비틀어 해석하고, 혼자만의 어두운 방에서 끝없는 섭섭함의 재판을 열며, 우리 관계의 미래를 가장 절망적이고 어두운 방향으로 미리 예측해 버립니다. 바로 그때 사도 바울은 그 모든 파괴적인 염려를 결코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그리고 숨이 막히는 순간에도 감사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아뢰라고 다정하게 권고합니다. 염려와 불안을 이기는 참된 반대는 아무 생각 없이 모든 것을 방치하는 무감각이 아니라, 내 앞에 놓인 문제보다 훨씬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눈을 들어 바라보며 찬양과 감사로 올려드리는 믿음의 기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눈물의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때, 우리의 모든 상식과 지각을 까마득히 뛰어넘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강이 우리의 지친 마음과 불안한 생각을 든든히 지켜주십니다. 이 하늘의 평강은 모든 갈등과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된 뒤에 비로소 상으로 받는 보상이 아니라, 여전히 사방이 꽉 막히고 풀리지 않은 채 얽혀 있는 관계의 현장 속에서도 성도의 내면이 무너지지 않도록 굳게 붙들어 주는 신비로운 은혜입니다. 우리의 황폐해진 마음이 하나님의 거룩한 평강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비로소 분노가 시키는 거친 말대로 함부로 입을 열지 않고, 상대방의 선한 의도를 악의로만 왜곡하여 해석하지 않으며, 다음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순종해야 할 거룩한 한 걸음을 온전히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참된 관계의 회복은 인간의 말싸움에서 이기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골방에서 무릎 꿇고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의 낮아진 마음에서 비로소 거룩하게 시작됩니다.

바른 생각이 화해를 삶으로 옮겨 심을 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의 마지막 대목에서 성도들을 향해 무엇보다 참되고, 경건하며, 옳고, 정결하고, 사랑할 만하며,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속에 깊이 생각하고 채우라고 엄숙히 권고합니다. 인간의 다툼과 갈등은 놀랍게도 그 물리적인 사건이나 다툼의 날들이 모두 지나간 오랜 뒤에도 우리의 기억과 상상 속에서 질기게 살아남아 영혼을 괴롭힙니다. 상대방이 내게 던진 차가운 한마디에 온갖 나쁜 의도를 덧붙여 상상하고, 과거의 상처 입은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수없이 반복하여 재판을 열며, 한 인간이 가진 연약한 순간을 그의 전체 인격과 삶의 전부인 것처럼 단정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바른 생각을 품는다는 것은 현실의 아픔을 무시하고 도피하는 헛된 도피주의가 아니라, 미움과 섭섭함이 내 내면의 유일한 해설자가 되지 못하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의 방향을 진리의 자리로 다시 세우는 거룩한 성경 묵상입니다.

참된 것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눈앞의 객관적인 사실을 내 감정대로 왜곡하지 않고 진실을 보는 것이며, 사랑할 만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리 미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내면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는 따뜻한 시선입니다. 상대방의 명백한 잘못과 실수를 눈으로 분명히 보면서도 그 한 사람을 그의 일시적인 실수와 완전히 동일시하여 매도하지 않는 태도 속에는 아주 깊고 풍성한 십자가의 신학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자신 역시 과거에 지옥에 마땅한 죄인이었음에도 오직 하나님의 한없는 십자가 은혜로 값없이 용서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기억할 때, 우리의 입술에서 날이 선 판단의 언어는 부끄럽게 낮아지고, 영혼의 깊은 곳에서는 회개의 문이 눈물과 함께 활짝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을 강력하게 경계합니다. 그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그대로 행하라”고 힘주어 명령합니다. 진정한 화해란 머릿속으로 아무리 고상하고 아름다운 평화의 문장을 이해하고 동의한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굳은 마음을 풀고 용기를 내어 안부 연락을 건네고, 내 생각만 앞세우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충분히 말을 들어주고, 그 다툼 속에서 나의 몫의 허물과 책임을 정직하게 인정하며, 공동체가 함께 그 상처의 짐을 나누어 지고, 날마다 눈물의 기도와 감사의 습관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용기 있게 옮겨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깊은 설교가 우리에게 비추어 주는 복음의 최종 목적지도 결국 화려한 말의 잔치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과 순종이 하나로 일치되는 거룩한 삶의 제사로 향합니다.

참된 교회란 세상의 기준처럼 처음부터 갈등이나 다툼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 완벽한 영웅들의 모임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보혈로 값없이 용서받은 은혜를 경험한 죄인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은 뒤에도 다시 엎드려 서로를 진정으로 용서하는 법을 평생토록 겸손히 배워 나가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비록 가끔씩 터져 나오는 갈등과 오해는 그 공동체의 연약함과 실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지만, 그것을 꽁꽁 숨기지 않고 십자가 복음의 빛 앞에 정직하게 가지고 나아갈 때 오히려 그 아픔은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사랑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얼마나 크고 실제적인지 세상에 낱낱이 보여 주는 가장 영광스러운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에게 약속한 복된 평화는 단순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상의 삭막한 평온이 아니라, 배우고 순종하는 공동체와 영원토록 함께 거하시며 눈물을 닦아 주시는 “평강의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오늘 이 순간,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어느덧 씻을 수 없는 앙금으로 굳어져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적’의 이름으로 각인되어 버린 사람은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그 사람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변하기를 애타게 기도하면서도, 정작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내려놓아야 할 나의 꺾이지 않는 자존심과 이기적인 욕망은 두 손에 악착같이 꽉 쥐고 놓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한 화해의 거룩한 첫걸음은 과연 우리 중 누가 먼저 자존심을 꺾고 사과해야 하는지를 치밀하게 계산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여전히 같은 주님의 은혜 안에 품에 안겨 있고 하늘의 생명책에 함께 나란히 기록된 존귀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따뜻하게 기억하는 데서 비로소 활짝 시작됩니다. 오늘 나는 그동안 차가운 상처의 이름으로만 불러왔던 그 사람의 이름을, 다시금 주 안에서 뜨겁게 사랑받아야 할 귀하고 소중한 형제자매의 이름으로 눈물로 부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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