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밤의 법정을 지우는 복음의 절대적 선언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명작 『심판』 속 주인공은 자신이 어떤 죄목으로 기소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하고 차가운 법정의 음산한 그늘 속을 방황합니다. 이 실존적 비극은 비단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일상의 삶에서 연약함으로 무너지거나 신앙적 실패를 경험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자기 내면 깊은 곳에 차가운 법정을 세우고 스스로를 피고석에 세우곤 합니다. 그리고 이미 끝난 형벌의 판결을 되풀이하여 읊조리며 잔혹한 자책과 정죄의 사슬로 스스로를 매어둡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가 로마서 8장의 말씀을 통해 선포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이 절망적인 어둠의 심연 한복판을 찢고 들어오는 전혀 다른 하늘의 음성을 들려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 어떤 조건도 없이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파격적인 사면선언입니다.
이 준엄한 복음적 선언은 결코 인간이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도덕적 방종에 빠져도 좋다는 무책임한 면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의 지독한 유혹과 싸우다가 번번이 무너져 내리는 성도의 절망적인 발걸음 아래, 구원의 절대적인 토대가 인간 자신의 완성도나 도덕적 결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절대적인 은혜에 있음을 일깨워주는 거룩한 안전망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쏟아냈던 처절한 탄식 바로 다음에, 8장의 위대한 전환점인 “그러므로(Therefore)”라는 접속사를 놓아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의 삶이란 단 한 번의 실패나 오점도 없는 결점 없는 인격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실패와 모순이 내 존재의 최종적인 판결이 되지 못하도록,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는 치열한 은혜의 여정입니다.
2. 정죄의 수렁을 넘어 소망의 새벽으로
인간이 자신의 죄와 한계를 명확하게 자각하게 될 때, 영혼은 두 갈래의 갈림길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는 자신의 죄악 됨을 아프게 미화하지 않고 인정하며 하나님께로 겸손히 돌아가는 ‘거룩한 회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에게 절망한 채 정죄감의 차가운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두어 버리는 ‘영적 자학’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면서도, 육신으로는 여전히 죄의 소원 아래 사로잡혀 있는 자기 내부의 괴물 같은 모순을 거짓 없이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탄식은 영원한 절망이나 회의주의로 문을 닫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판결된 거룩한 구원의 희망으로 힘차게 이어집니다.
특히 사도가 로마서 8장을 열면서 “그러나”라는 반전의 언어가 아니라, “그러므로”라는 연결의 언어를 사용한 대목은 깊은 신학적 신비를 품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실패와 모순을 깨끗이 지워버린 뒤에야 비로소 완전히 다른 구원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그 비참한 실패의 자리 한복판에서, 이미 자신에게 불변하게 주어진 구원의 반석을 기억하라는 촉구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한계와 실수를 우회하거나 가리지 않으며, 도리어 그 비참한 모순의 중심부에 은혜의 절대적인 확실성을 기둥으로 세웁니다. 이로써 성도가 걸어가는 성화(Sanctification)의 길은 불안감에 휩싸여 자신의 구원을 입증해 내려는 병리적인 자기 증명의 강박이 아니라, 나를 먼저 조건 없이 사랑해주신 그 거대한 사랑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신실한 순종의 걸음이 됩니다.
“이제(Now)”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 속에는, 성도의 일상에 영원히 지속되는 은혜의 시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처음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하던 그 순간에만 유효한 일회성 선언이 아닙니다. 성화의 전 과정 속에서 죄의 소원과 싸우고, 모질게 넘어지며, 다시 피 묻은 십자가를 붙들고 일아서는 모든 순간마다 성도의 영혼을 신실하게 붙들어주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은 성화의 거룩한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성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영적 토대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을 때, 비로소 성도는 자신의 치부와 죄를 은폐하지 않고 빛 되신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내어놓을 수 있으며, 자신의 유한한 실패보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더 크게 바라보는 안목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는 것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종교적 감상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생명적 사랑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는 말씀은 인간의 의지나 결심이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하여, 성도의 삶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영적 통치와 신분이 완벽하게 교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율법이 인간 육신의 연약함과 부패함 때문에 결코 이루지 못했던 그 공의의 요구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마침내 온전히 이루어 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의 죄를 결코 모른 척 묵인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죄악이 한 인간의 이름 전체를 규정하거나 망가뜨리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3. 내주하시는 성령과 거룩한 내면의 혁명
로마서 8장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사이의 치열한 대립을 명확하게 마주 세웁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육신의 생각은 결국 영적 사망과 멸망으로 기울어지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영의 생각은 성도의 영혼을 생명과 진정한 평안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육신(Flesh)’은 단순히 인간의 물리적인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아를 신격화하려는 타락한 죄적 본성을 가리킵니다. 그렇기에 성도가 싸워야 할 신앙의 전투는 외형적인 종교적 행위를 가다듬는 데 머물지 않으며, 오늘 내 마음의 왕좌를 과연 무엇에게 지배하도록 내어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내면의 완전한 순종으로 깊어지게 됩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사도의 권면은 성화가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영적 메커니즘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린 죄의 고질적인 습관들은 인간의 금욕적 도덕 수양이나 의지력의 과시만으로는 결코 끊어지지 않으며, 오직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 안에서만 비로소 다루어질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도가 죄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과 정죄감에 사로잡혀 영적 무기력증에 빠지기보다,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죄의 세력과 담대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말씀의 맥락을 강하게 강조합니다. 회개는 빼앗긴 구원을 다시 매수하기 위해 지불하는 고통스러운 대가가 아니라, 이미 거룩한 은혜의 구원 안에 세워진 자가 옛 죄의 길에서 돌아서는 마땅한 사랑의 응답입니다.
정죄감과 참된 회개는 모두 자신의 ‘죄’라는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지만, 그것이 인간을 끌고 가는 영적 방향은 완전히 극과 극을 달립니다. 마귀가 주는 정죄감은 “너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속삭이며 성도로 하여금 수치심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숨어버리게 만들지만,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참된 회개는 죄의 비참함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아빠 되신 하나님을 향해 담대히 달려가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회개는 자신을 미워하고 자학하는 고독한 독백이 아니라,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다시 말을 건네는 거룩한 기도입니다. 결코 넘어지지 않는 무결한 사람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십자가 복음의 빛을 향해 영혼의 방향을 고쳐 잡는 사람이 비로소 참된 변화의 길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언젠가 먼 미래에 도달해야 할 아득한 종교적 이상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의 구체적인 삶을 움직이는 신실한 동력입니다. 죄로 인해 결국 죽게 될 우리의 유한한 몸조차도 끝내 부활시키실 성령께서 우리 내면에 거하시기에, 성도가 현재 겪고 있는 육체적·영적 연약함은 결코 다가올 미래의 패배를 확정 짓지 못합니다. 참된 신자란 삶에서 모든 유혹이 완전히 사라진 사람이 아니라, 더 이상 그 유혹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길 필요가 없어진 영적 자유인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자유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향한 순종은 더 이상 짐스러운 의무가 아닌 기쁨이 되며, 그 순종은 성도의 삶에 생명과 평안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갑니다.
4. 종의 공포를 밀어내는 양자 됨의 신비
십자가 복음의 영광은 단순히 죄를 용서해 주는 법정적 사면에서 멈추지 않고, 인간의 근본적인 신분과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자리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거룩한 성도들은 더 이상 형벌과 죽음의 공포에 매여 종노릇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입양된 자들입니다. 구원이란 단순히 지옥의 형벌을 피하게 되는 소극적 사건에 그치지 않으며,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비참한 인간이 그분을 향해 “아빠 아버지(Abba, Father)”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근본적인 관계의 영광스러운 회복입니다. 이 친밀한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신학적 사실이야말로, 구원받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깊고 가슴 벅찬 영적 자유입니다.
설교가 상세히 해설하는 ‘양자 됨(Adoption)’의 법률적·신학적 이미지는 이러한 은혜의 자유를 더욱 명징하게 입증합니다. 로마 시대에 타인의 가문에 입양된 아들이 이전의 모든 채무와 신분적 굴레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친자와 완전히 동일한 법적 권리와 상속권을 얻었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죄와 사망이 지배하던 옛 신분의 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의 가문으로 옮겨진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신분적 변화를 증언해 주는 이는 성도 개인의 변덕스러운 감정이나 기분이 아니라, 우리 영혼 안에 친히 거하시는 거룩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임을 끊임없이 증언해 주시기에, 우리의 믿음은 기분이나 환경이 좋은 날에만 유지되는 가벼운 자기 확신으로 전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이름표 안에는 가슴 뛰는 특권과 함께 거룩한 영적 책임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놓여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우주적 유업을 물려받을 거룩한 상속자이자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이지만, 단순히 장차 나타날 영광에만 참예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십자가의 고난에도 기꺼이 동참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아빠 아버지”라는 사도적 부름은 삶의 모든 정황이 평안하고 안전할 때에만 나지막이 읊조리는 안도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의 가장 무겁고 어두운 고난의 순간 속에서도, 나를 향한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변함없이 신뢰하며 묵묵히 순종하게 만드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이 자녀로서의 정체성은 성도가 일상에서 내리는 모든 실존적 선택의 순간마다 깊숙이 침투하여 작동합니다. 내 앞에 예고 없이 두려움과 시련이 찾아올 때, 형벌을 두려워하는 종처럼 대가와 손익만을 타산적으로 계산할 것인지, 아니면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는 자녀처럼 담대하게 발을 내딛을 것인지가 그의 존재적 방향을 갈라놓게 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영적 확신은 결코 무모한 방종을 낳지 않고, 도리어 성숙하고 책임 있는 순종의 삶을 만들어내며,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상속의 약속은 현재의 삶을 결코 가볍게 탕진하지 않도록 성도를 거룩하게 파수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유업을 대망하면서, 오늘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아버지의 거룩한 성품과 마음을 겸손히 배워갑니다.
종의 영을 가진 자는 작은 실수나 실패에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당장이라도 끊어질까 안절부절못하며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참된 자녀의 믿음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징계와 혹독한 시련의 용광로 속에서도 자신이 과연 누구에게 속해 있는 존재인지를 결코 망각하지 않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구원의 선언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양자 됨의 은혜를 하나의 거대한 영적 줄기로 묶어 선포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히 용서받았다는 영점의 확신은 우리를 무책임한 방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버지의 거룩한 마음을 닮아가고자 하는 거룩한 용기와 열정을 우리 안에 불어넣어 줍니다.
5. 탄식을 지나 영광의 종착지로 향하는 소망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정체성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도가 이 땅에서 겪어야 할 실존적인 고난과 눈물의 현실을 순식간에 erasure(지워버림) 해주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가는 참된 성도는 십자가의 무게를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며, 삶의 매서운 시련 한복판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향해 더욱 깊이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성도가 겪는 고난은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거나 징벌을 받고 있다는 슬픈 증거가 아닙니다. 성령의 조명 안에서 그 고난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온전히 매만져 가며,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날을 사모하게 만드는 거룩한 성화의 도구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자신이 겪는 삶의 아픔과 고난을 굳이 거룩하게 포장하거나 미화할 필요가 없으며, 고난의 무게 앞에서 무리하게 강한 척할 필요도 없습니다. 로마서 8장이 성도에게 제시하는 찬란한 소망은, 일상의 눈물과 탄식 자체를 허무하게 부정함으로 얻어지는 희미한 위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의 깊은 탄식과 아픔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증언이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비롯됩니다. 지금 내가 흘리는 이 아픈 눈물이 내 인생의 마지막 장이 아니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을 때, 성도는 자신의 상처를 부끄럽게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 상처에 자기 존재의 미래를 비참하게 내어주지 않습니다. 성도가 품은 소망은 현실을 도피하는 무책임한 시선이 아니라, 모순 가득한 현실 너머에서 역사 속 구원을 완결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며 묵묵히 참아내는 거룩한 인내입니다.
로마서 8장의 장엄한 말씀의 흐름은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 그리고 영화(Glorification)라는 신학적 개념들이 결코 파편화된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지금 이 순간 성령의 인격적인 도우심 안에서 날마다 변화되어 가고 있으며, 마침내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완선의 날을 향해 소망 가운데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육체적·도덕적 연약함은 우리의 구원이 거짓이라거나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지금 온전한 완성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는 거룩한 표지입니다. 복음이 성도에게 선물하는 근원적인 기쁨은 아무런 상처나 오점이 없는 만화 같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아픈 상처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날마다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거룩한 자유에서 비롯됩니다.
장재형 목사의 깊이 있는 성경 묵상은 결국 우리를 허황된 종교적 자신감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획득한 고차원적인 존재론적 정체성의 자리로 조용히 안착시킵니다. 나는 나에게 죄가 없고 완벽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 안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기에 날마다 죄와 싸울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또한 내가 겪는 고난의 무게가 결코 가벼워서 소망을 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아빠 아버지의 사랑이 그 어떤 고통보다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기에 오늘도 묵묵히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절대적인 은혜의 선언은, 오늘도 우리를 참된 회개와 기쁜 순종의 현장으로 깊이 있게 초청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여전히 나의 처참한 실패만을 붙들고 내면의 차가운 법정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온전히 품으시는 “아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생명과 참된 평안의 길을 향해 담대히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