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역설, 낮은 곳으로 흐르는 생명: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교를 통한 로마서 12장 묵상

빅토르 위고의 대작 『레 미제라블』의 거대한 서사 안에는 한 인간의 영혼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신비로운 밤’의 기록이 존재합니다. 1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차가운 감옥의 벽에 갇혀 분노와 적개심으로 심장이 굳어버린 장발장. 그는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준 미리엘 주교의 호의를 배신하고 은식기를 훔쳐 달아납니다. 그러나 헌병들에게 붙잡혀온 그에게 돌아온 것은 서슬 퍼런 처벌의 채찍이 아니었습니다. 주교는 오히려 그가 잊고 간 것이라며 은촛대까지 내어주며, 이 은은 당신의 영혼을 악으로부터 사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한 ‘값’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극적인 장면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설파한 복음의 정수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것은 악을 더 강력한 악으로 응징하여 굴복시키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의 압도적인 힘으로 악의 뿌리를 녹여버리는 복음의 역설입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설교는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설교는 단호하게 답합니다. 믿음은 타인을 심판하기 위해 높은 보좌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형제의 발을 닦기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순종의 길이라고 말입니다.


1. 낮은 곳에서 비로소 보이는 ‘존재의 무게’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 (로마서 12:16)

이 구절은 단순히 성품이 온순해야 한다는 도덕적 훈계가 아닙니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타자를 대하는 신학적 태도를 규정합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에 따르면, 진정한 ‘낮아짐’은 상대방의 처지와 고통의 깊이 아래로 나를 위치시키는 결단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식(Knowledge)을 정보의 습득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에 대한 데이터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물과 형편을 나의 어깨에 옮겨 싣는 공감의 연대를 의미합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무게와 가치는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래에서 그를 떠받치고 섬길 때, 그 존재가 지닌 고귀함과 아픔의 실체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겸손은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화려한 장식품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의 뿌리입니다. 낮아짐이라는 토양이 없으면 사랑은 공허한 수사가 되고, 타인에 대한 이해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해석에 갇히게 됩니다. 교회가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로 거듭나려면 “누가 더 옳은가”를 따지는 논쟁보다 “누가 더 낮아져 형제를 부축할 것인가”를 묻는 헌신이 앞서야 합니다.


2. 사랑이라는 필터로 거른 ‘살아있는 지혜’

바울은 이어서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는 학습된 지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결여된 지식의 폭력성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진정한 신학적 통찰이 타인을 논리적으로 제압하는 예리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겸손에서 발원한다고 강조합니다.

구약의 잠언은 때로는 미련한 자에게 대답하지 말라고 하고, 때로는 그 기를 꺾기 위해 대답하라고 조언합니다.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이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에 근거한 분별력’입니다. 어떤 때는 침묵이 한 영혼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고, 어떤 때는 날카로운 권면이 잠든 영혼을 깨우는 나팔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 지식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과 침묵이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선’을 이루고 있는가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빌레몬서에 나타난 바울의 태도를 그 지혜의 전형으로 제시합니다.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위로 빌레몬을 압박하여 오네시모를 용서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령 대신 ‘사랑의 간구’를 택합니다. 억지 순종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변화를 기다리는 것,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겸손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것이 바로 복음의 지혜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3. 보복의 권리를 양도할 때 찾아오는 ‘진정한 자유’

로마서 12장의 정점은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고 불편한 자리로 인도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여기서 말하는 ‘선’은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막연한 착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처 입은 자아가 복수의 본능으로 기울어지려 할 때,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선택하는 처절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심판자의 자리에 앉으려 합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심판의 권리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일깨웁니다.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완벽한 기회 앞에서도 칼을 거두었던 다윗을 떠올려 보십시오. 다윗은 자신의 분노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사적 보복을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판의 자리를 하나님께 비워두었습니다.

이것은 비겁함이나 나약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가장 강력한 영적 승리입니다. 내가 직접 복수하려 하는 순간, 나는 나를 공격한 그 악의 노예가 되어 똑같은 괴물로 변해버립니다. 하지만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선을 선택하는 순간, 미움의 사슬은 끊어지고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복수하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으며, 선을 행하다 손해를 보아도 하나님이 채우실 것을 믿는 당당함—그것이 바로 은혜 입은 자의 특권입니다.


4. 십자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유일한 승리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로마서 12:20)

인간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 말씀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저주하고 못 박는 자들을 향해 똑같은 저주를 퍼붓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짜내는 도덕적 실천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악의 방식에 물들지 않게 우리를 붙드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오늘 우리에게 매우 실존적인 과제를 남깁니다.

지금 나는 누군가를 품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죄하기 위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습니까? 내 안의 끓어오르는 분노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맡겨졌습니까, 아니면 ‘정의’라는 탈을 쓰고 보복의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까?

성경 묵상은 고요한 서재에서 시작되지만, 그 진위는 가장 불편한 관계의 현장에서 검증됩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지우고 싶은 아픈 기억, 마주하기 싫은 상처 앞에서 말씀은 우리를 흔듭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부름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오늘 내가 만나는 누군가에게 건네는 작은 친절, 비난 대신 선택하는 축복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은 힘과 권력이 평화를 가져온다고 믿지만, 십자가는 낮아짐과 사랑이 영혼을 살리고 미움의 감옥을 부수는 유일한 길임을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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