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고별설교 – 장재형목사

Ⅰ. 사도행전 20장의 배경과 바울 사도의 모범  사도행전 20장 17절부터 35절까지의 본문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서 불러 모아 마지막으로 권면하고 작별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는 흔히 ‘바울의 고별설교’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고별의 말씀 안에는 바울 사도의 사역 철학, 복음 전파의 핵심, 그리고 교회의 존재 이유가 매우 밀도 높게 압축되어 있다. 특히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구약형 교회와 신약형 교회의 차이점을 심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조하는 … Read more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 장재형목사

요한복음 18장 12-22절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결박당하여 대제사장 안나스에게로 먼저 끌려가시는 장면을 매우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장면은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사건을 결정적으로 준비하는 핵심적인 순간이다. 특히 요한복음 기자는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서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다루어진 안나스의 존재를 분명하게 부각함으로써, 종교 권력의 부패와 음모가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향해 작동했는지 고발한다. 여기에는 대제사장직의 세습과 타락한 종교 권력의 실체가 분명히 드러나며, 예수님께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의 거짓과 폭력에 의해 … Read more

바울의 회심 – 장재형목사

1.바울의 회심 장재형목사는 현대 교회 안에서 사도적 열정과 선교적 비전을 강조하며 복음의 본질을 붙드는 일에 매진해 온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교회를 향한 뜨거운 열정,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도전 정신은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떠올리게 하는 면모가 있다. 바울은 원래 이름이 사울이었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열혈 유대교 학자이자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다메섹까지 긴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그 도를 좇는 사람들”, 곧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공문까지 받아 떠날 정도로, 바울은 자기의 신념에 철저했다. 이처럼 사울의 삶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에는 목숨까지 내거는 열정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독종’ 같은 인물을 택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오묘하고 놀라운지 성경은 여실히 보여 준다. 장재형(장다윗)목사의 사역적 특징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깨어진 틀을 뒤엎고 도약하는 선택’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설파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는 복음이 단순히 ‘착하고 온유한 사람들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때로는 거친 영혼, ‘이리와 같이 지독한성정을 지닌 이들’까지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수없이 강조해 왔다. 교회 역사를 돌아봐도 초기 기독교를 가장 혹독하게 박해하던 사람이 세계 선교의 주역으로 변화된 사건이 대표적이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던 원수에게조차 당신의 증거자로 삼으신다”는 복음의 역설적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순간, 곧 다메섹으로 향하던 중 빛 가운데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었던 순간은, 그야말로 인생의 대전환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현대 그리스도인들, 또한 현대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심오한 메시지를 던진다. 장재형목사는 본래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이러한 성경적 패턴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며, 복음 전파의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음을 설교를 통해 거듭 강조해 왔다. 특히 그가 전하는 메시지 속에는 ‘적극적인 순종’과 ‘불가항력적 은혜’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울이 빛 가운데 꼬꾸라져서 눈을뜨지 못한 채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던 장면은 하나님의 능동적인 역사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 ‘무력해진 상태’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에 제대로 귀 기울일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그저 수동적 패배로만 보지 않고, “강력한 은혜로의 초대”라고 강조한다. 갈 수 있는 길이라면 끝까지 도망가고 싶어 하는 요나 같은 인물도, 또는 교회를 미워하는 감정에 사로잡혀 일일이 성도들을 붙잡아 죽이고자 했던 사울 같은 인물도, 결국 하나님의 손길 아래에선 쓰임받을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목회 현장에서 설파하는 부르심의 신학은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부르셔서 함께 일하시기 위해 구원하신다”라는 데 강조점이 있다. 그는 성도들에게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나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으라고 끊임없이 권면한다. 그 음성은 삶의 어느 지점에서 불쑥 찾아올 수도 있고, 인생의 가장 높이 올라 있는 순간 혹은 가장 밑바닥에떨어진 순간에 들릴 수도 있다. 다메섹 도상에서 비취었던 빛이 사울을 완전히 둘러싼 것처럼, 때론 인간이 예측하거나 설명할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한다. 하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걸어가려면 반드시 ‘순종의 걸음’이 필요함을 장재형목사는 반복해서 가르친다. 사울이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으며 그를 ‘주’라 칭한 순간 이미 그는 의심할 수 없는 체험을 통해 예수의 주 되심을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는 주의 음성대로 다메섹 성으로 들어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또 다른 제자 아나니아를 만나야 했다. 그것이 사울의 낮아짐이요, 순종의 핵심인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을 두고 말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결국은 고생만 할 뿐이다. 가시채를 뒷발질해봐야 더 아플 뿐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목적을 위한 부르심은 인간의 재주와 꾀로 피해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독종 같은 사람’을 붙들어 쓰신다 함은, 착하고 선량해 보이는 사람만이 아니라, 때로는 매우 거칠고 세상적욕망과 분노가 가득한 사람마저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드러낸다. 장재형목사의 메시지에 있어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것이다. 교회는 어쩌면 ‘양 같은 사람’에게만 문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오히려 이 시대에 우리가 눈 여겨보아야 할 대상은,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고 교회를 향해 적개심을 가진 이들, 세속의 욕망을 좇아 질주하는 이들, 심지어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이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이 붙들어 쓰실 때 새로운 개척의 시대를 열 만한 ‘이리 같은 사람들’일 수 있다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교회가 사회의 다양한 영역으로 직접 찾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가 선교의 범위를 교회 내부에 머물게 하지 않고, 다양한 문화 사역과 언론 사역, 그리고 국제적인 봉사 단체와의 협력 등을 통해 넓혀가려는시도는, “교회를 박해하던 자들까지 품어야 한다”는 본문적 적용에서 나온 실제적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다메섹까지 달려가 교회를 다 잡아들이려 했던 사울에게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었듯, 교회도 기꺼이 ‘다메섹 길’까지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간의 의지나 상황을 초월한다. 장재형목사의 목회와 설교는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며, 우리의 한계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은혜로 시작된 사역은 결코 인간의 손발 묶임이나 환경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선포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바울의 회심 이야기가 현대에도 유효한 까닭이다. 2. 원수를 ‘형제’라 부르는 사랑 바울의 드라마틱한 회심은 단지 사울 개인에게만 이루어진 특별 사건이 아니었다. 이 회심에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조역이 있다. 바로 다메섹에 살고 있던 제자 아나니아이다.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아나니아에게 “아나니아야”라고 부르시며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그가 기도 중이다”라고 명하셨을 때, 아나니아는 순간적으로 반발했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해 내가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는데,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고, 여기서도 주의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 반발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적 감정이다. 사울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해 왔는지 이미 소문으로 들어알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다시금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결국 아나니아는 순종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형제 사울아”라고 부르며 그에게 안수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복음의 역설적 은혜가 어떠한 결을 띠고 있는지 확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을 “박해자였던 원수에게형제의 손을 내미는 복음의 진정한 가치”라고 강조한다. 주님께서는 박해자 사울을 택하셨을 뿐 아니라, 이미 믿음 안에 있는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에게 ‘형제의 손길’을 건네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만약 아나니아가 “싫습니다, 저 사람만은 안 됩니다”라고끝까지 거부했다면, 사울의 회심 여정은 좀 더 복잡하고 어려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주님의 명령을 받아들였고, 그 즉시 사울을 “형제”로 받아들였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 교회가 새겨야 할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교회가 과연 불신자들이나 적대적인 사람들에게쉽게 ‘형제(자매)’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교회 안에도 때로는 편 가르기와 배타적인 태도가 존재한다. ‘이미 복음을 받고 양 같이 순한 사람들’만 어울리고, 거칠고 교회를 반대하는 이들은 멀리하거나 거부하는 모습이 흔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 본문은 박해자마저도 하나님이 선택하실 수 있음을 경고하듯 일깨워 주며, 더 나아가 이미 믿는 자들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준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회심과 아나니아의 ‘순종과 환대’라는 두 축을 동시에 본다. 사울이 내면적 회심을 경험했다면, 아나니아는 공동체적 환대의 통로로 쓰임받았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을 가리켜 “은혜가 은혜를 낳는다”라는말로 요약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직통적인 은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손길과 환대로써 완성되어 가는 은혜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 내에서, 강력한 은혜 체험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는 동시에, 교회 내부의 공동체 의식은 때론 폐쇄적으로 흐르기도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 9장에 나타난 아나니아의 역할은, ‘교회는 은혜 체험한 개인을 품어 주어야만 진정한 복음 공동체가완성된다’는 메시지를 준다. 그리고 장재형목사는 목회를 통해 이 원리를 실제로 적용해 보이려 노력해 왔다. 장재형목사가 인도하는 공동체들에서, 혹은 그가 가르치는 양육 체계에서, 방황하는 이들이나 과거 교회를 적대하던 이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호를 활짝 열어 놓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가르침 속에는 “가장 미워하는 자를 당신의 증거자로 삼는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요청이 늘 깔려 있다. 이는 교회가 의도적으로 ‘골치 아픈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의시선에서 볼 때 그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이 보기에 가장 나쁜 사람에게조차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라고 권면한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형제’라는 호칭을 사용하자마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다시 보게 되었듯, 우리가누군가를 적대자로 간주하고 밀어내는 순간, 그 사람의 영혼이 어쩌면 더 오랜 시간 눈이 감긴 상태로 방황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의 순종과 환대가 다른 이의 회심과 회복에 결정적인 열쇠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본문에서 보여 주는 놀라운 교훈이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와 세미나 등에서 종종 “교회는 살기 등등한 눈빛으로 찾아오는 사람을 과연 품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질문을 꺼내며, “그가 결국 ‘형제 사울’이 될 수 있도록, 아나니아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것이 곧 복음이 가진 힘이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3.바울의 선교적 사명 바울의 회심 이야기에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또 다른 포인트는, 사울이 바울이 되어 결국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어 안디옥 교회에 이르러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사역을 하는 장면, 또 소아시아와유럽으로 복음의 지경을 넓혀 가는 장면 등은, 사도행전 후반부의 핵심이 된다. 바울의 서신서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복음을 전했고, 전도 여행 중 숱한 고난을 겪었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바울이 생애 내내 겪은 고난은 실로 파란만장했다. 매맞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하고, 배가 난파되어 표류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동족으로부터의 반대와 이방 도시에서의 박해 등 끊임없는 장애물이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수많은장애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계속 퍼져 나갔다는 점이, 초대교회 선교의 가장 큰 ‘아이러니이자 기적’이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삶을 묵상하면서, “복음 전파는 전적으로 인간적 조건이나 환경의 유리함 때문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선교 신학의 한 기둥은, “박해나 고난이 오히려 복음의 지경을 넓히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도행전 8장 이후로 박해가 거세지자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성도들이 곳곳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던 ‘디아스포라 효과’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 자신이 아주 극렬한 박해자였으나, 그가 회심해 전 세계로 복음을 전했듯이, 세상을 대적하던 힘들이 주님께로 돌이켜 복음을 증거할 때 그 시너지 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현대 교회가 배워야 할 점은, “이 땅에 복음을 거부하는 환경이나 적대적 정세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한가운데 뛰어들어복음을 전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사회가 교회를 비판하거나, 혹은 교회 외부에서 기독교를 부정적으로바라볼 때에 움츠려 들기보다,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문화적 장벽을 넘어가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헬라인, 그리고 로마 시민들에게 각기 다르게 접근하여 복음을 전했던 태도를 닮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장재형목사는 언론을 통한 복음 전파, 교육기관 및 문화사역, 또 봉사와 구제 활동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해 세상과 접촉면을 넓히자고 제안한다. “회당이 여러 곳에 퍼져 있듯이,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현장도 다양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채로운문화적 접점을 연구해야 하며, 때로는 인터넷과 미디어를 포함하여 가능한 모든 통로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사울이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받아 교회를 박해하려 했던 것처럼, 역설적이게도 이제 교회가 세상 도처로 파고들어가복음을 증언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또 하나의 핵심은,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할 때마다 반드시 함께 했던 동역자들의 존재다. 바나바, 실라, 디모데, 누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등 여러 인물이 함께하며, 그들의 헌신과 협력이 복음 전파의 열매를 함께 맺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동역’과 ‘팀 사역’을 매우 중시한다. 복음은 결코 혼자 힘으로만 확장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때와 함께 동역자들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효과적으로 전파된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 있어 중요한 조직 운영 원리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그저 한두 명의 유명한 리더에게 모든 사역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성도가 함께 책임을 나누어 갖고연합하여 일할 때,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적 능력이 다시금 회복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 원리는 ‘바울의 사도적열정과 아나니아의 순종, 바나바의 격려’가 함께 맞물려 돌아간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에서 자주 등장하는말은 “서로의 은사를 존중하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4. 은혜의 실제 바울의 회심 이야기가 가진 정점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을 부르시고, 또 그를 통해 무엇을 이루실지”를 단 한 순간에 극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이다. 그토록 복음의 적대자였던 사울이 복음 전파자로 변화되는 일은 어찌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고 교회 역사는 그 불가능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증언해 왔다.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과연 저런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저렇게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이 정말 회개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과 불신이 교회 안팎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사울의 이야기를 되짚을 필요가 있다. 그가 가졌던 적대감과미움, 살의, 위협은 결코 작은 수준이 아니었다. 돌에 맞아 숨진 스데반의 죽음에도 사울은 동의했고,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루살렘에서 먼 다메섹까지 걸어가서라도 예수를 믿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런데 그 지독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은 친히 찾아오셔서 강권적으로 부르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리고 그를 눈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게 하셨다. 이 기간 동안 사울의 영혼은 그어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혼란과 깨달음을 겪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 자신이 철저히 거부하고 배격했던 그 예수가 진정‘주’라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자기 뜻과 전혀 반대되는 지점에서 무너져야 했던 사울의 체험은,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오직 은혜’의 관점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얼마나 고상한 신앙 교육을 받았는지, 혹은 내 인격이얼마나 흠없고 선한지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내가 가장 약하고 추악하고 지독한 상태일 때조차, 하나님은 그 인생을 들어 쓰셔서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는 성경적 메시지를 전한다. 이 메시지는 장재형목사가 중점을 두고 세워 온 다양한 사역의 비전과도 연결된다. 예를 들어, 교회 밖 청년들 혹은 여러 가지아픔과 상처를 안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미는 사역, 그리고 사회적·문화적 활동을 통해 복음을 드러내는 일 등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세우실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바울의 사건에서 확증되는 복음의 실제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설교 속에서 “바울이 처음부터 사도가 아니었음을, 그는 그리스도를 가장 미워하던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자”라는말을 자주 꺼낸다. 이것을 단지 ‘바울이 대단한 간증을 가진 인물이다’ 정도로만 치부해서는 안 되며, “오늘날에도 똑같이 하나님은 그러한 이들을 세우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적용해야 한다. 그저 가능성 있는 인재만을 선발해서 쓰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우리가 보기에 ‘가장 불가능해 보이는 이’조차 택하여 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 Read more

밤이러라 – 장재형(장다윗)목사

Ⅰ.  “사랑을 외면한 배반의 자리” 요한복음 13장 20-30절에서 나타나는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라는 장면은 겉으로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 같지만, 그 이면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이 본문을 놓고,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배반의 심리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눈앞에 있음에도 끝까지 붙들지 못하는 완악한 마음이 결국 어떤 파국을 낳는지에 대해 자주 강조한다. 여기서 “밤”이라는 단어는 … Read more

종에서 아들로 – 장재형(장다윗)목사

Ⅰ. 복음과 율법의 대비, 그리고 아들 됨의 의미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갈라디아서 3장 23절부터 4장 7절까지는 하나로 연결되는 긴 호흡의 단락이다. 사도 바울은 이 단락 속에서 “아들과 유업”이라는 핵심 주제를 다루는데, 그 모든 과정에서 “누가 하나님의 유업을 받느냐”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제기한다. 갈라디아서 3장의 결론 부분(3:29)에서 이미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밝히고, 그 흐름이 이어지면서 4장 1절 이후로 아들 됨의 정체성과 실제 상속에 관한 설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바울은 복음과 율법을 날카롭게 대조하며, 율법은 종의 역할을 했고 복음은 우리를 아들로 세운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한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는 율법으로 회귀하려는 유대주의 크리스천, 곧 거짓 교사들이 득세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복음으로말미암아 이미 구원을 받았음에도 교회를 다시 율법으로 끌고 가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 앞에서 바울은 “도대체 너희가지금 교회를 어디로 끌고 가려 하느냐?”라고 외치며, 우리가 받은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자유를 가져왔는지를 강조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여러 설교와 강의를 통해서 갈라디아서의 이러한 흐름을 조명하며, 복음과 율법의 대조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지속적으로 설명해왔다. 복음은 아들이 되게 하고, 율법은 종 노릇을 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은 복음이 가져다주는 자유와 정체성 회복의 핵심을 잘 드러낸다. 종은 구속 아래 있으며 자기 뜻대로 살 수 없지만, 아들은 자유를 누리고 상속의 권리를 가진다. 바울은 이 사실을 단순히 사변적으로 말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체험한 복음의 능력 안에서 역설한다. 율법 중심으로 돌아가는것은 ‘멍에’를 다시 메는 것과 같으며,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명백히 결론짓는다. 이러한 논리는 단순히 ‘유대교 vs. 기독교’라는 종교적 대립 구도를 넘어, 인간의 본질적 구원 문제가 무엇으로 해결되느냐 하는초점에 맞춰진다. 인간이 ‘아들’이 되느냐, 아니면 ‘종’인 상태로 머무느냐의 분기점이 바로 ‘복음’과 ‘율법’이라는 두 길에 의해갈린다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를 아들로 회복시키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종종 이 자유와 아들 됨을 붙들지 못하고, 다시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멍에 안으로 들어가곤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말미에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선언하며, 바로 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풍성함이 누구를 통해 계승되느냐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혈통이나 율법 준수 여부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역사적·영적 상속임을 뚜렷하게 천명하는 대목이다. 우리도 일상에서 이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가 많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자의식이 흔들릴 때, 마치 씨름이나 유도 경기에서 중심이 무너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함께 무너진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외치듯, 우리가 이미 아들이 된 이상 더 이상종의 멍에를 맬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는데, 다시 율법과 공로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애써 얻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바울은 이 점을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거짓 교사들에 맞서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논박한다.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이 부분을 특히 강조하며, 우리 안에 확고한 아들 됨의 정체성이 있을 때, 영적 성장과 자유, 그리고 실제적 능력이 흘러나온다고 가르친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자의식이 흔들리지 않으면, 아무리 어둠의 세력이흔들어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마치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마귀의 시험 앞에서도 담대히 이기셨듯이, 우리가 자신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주님 안에 있는 자유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 예수님은시험을 받으실 때마다, 그 밑바탕에 흐르는 확신으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러므로 나는 떡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라고 응수하셨다. 이러한 자의식과 영적 확신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갈라디아서전체 맥락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우리가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점을 논리적, 역사적, 신학적으로 증명해낸다. 갈라디아서 4장 1~2절에서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율법 아래 있던 유대교 역사 전체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종으로서 몽학선생과 같이 역할하는 율법을 통해서 성장하였고, 이제 때가 차매 아들로 자유롭게 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킨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은 율법의 멍에로 다시 돌아갈 것을 강요했다. 바울은 “너희가 어찌 다시 종으로 돌아가려 하느냐?”고 분개하며, 이것이 복음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종교의 습성”이 얼마나 우리의 자유를 갉아먹는지 설파한다. 율법적·종교적인 사고는 겉보기에 경건해 보이지만, 실상은 인간을 속박하고 영적 능력을 소멸시키는 경향이 크다. 그래서 종교적 행위나 의무에 매달려 힘들어하다가‘아들로서의 자유’를 놓치면, 결국 교회 내에서 분열과 정죄가 일어나게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러한 상황을 “어찌하여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 하느냐?”라고 질책하며, 복음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주지시킨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절정을 이루는 이 선언—“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은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넘어서 모든 시대 교회에 주는 강력한 권면이자 경고다. 우리가 종이 아니라 아들임을 완전히 붙들 때, 우리는 스스로를 ‘죄의 종’으로 규정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의롭다 여김받은 자’로 확립해 간다. 교회가 다른 멍에와 규칙에 집착하는 순간, 아들의 자유와 능력이 가려져버린다. 갈라디아 교인들이율법적 부담을 지고 날과 달, 절기와 해를 지키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은 결국 초등학문에 매여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삶의 형태로 되돌아간 것과 같다. 반면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신 것”(갈 4:4-5)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저주가 되어주신”(갈 3:13)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 더 이상 죄의 종으로 머무르지 않고 아들로서 담대히 살아갈 수 있음을 선포한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복음의 본질은 ‘종을 아들로 바꾸는 능력’에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책감과 두려움을 무너뜨리고, 아들과 딸로서의 자유함을 회복시키는 것이 복음의 힘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Incarnation)은, 우리에게 그분이 얼마나 사랑으로 구원하기 원하시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수 있는 분이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 죽음에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어리석음”(고전 1:25)이다. 하지만 이 어리석은 방식이야말로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구속의 길이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로마서 5장의 대표이론)로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 주셨다. 이렇게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건으로 완성된 구원은, 아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특권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그것이 곧 유업 상속이며, 아들의 영(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내주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갈 4:6). 과거에는 종의 신분이라 감히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을 수 없었는데,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히 10:19). 이처럼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인간의 역사와 신학, 그리고 실제 삶을 가로지르는 가장 근본적인 은혜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복음이 우리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심어줄 때, 우리는 더 이상 초등학문과 율법의 멍에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Ⅱ. 갈라디아서 4장 속 아들과 유업의 핵심 메시지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 4장 1~7절에서 중점적으로 풀어가는 논리 구조를 살펴보자.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다”(갈 4:1-2)는 것은, 앞서 3장 23절 이하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율법의 시기를 ‘잠정적 보호자 혹은 후견인’의 시대에 빗댄 것이다. 율법은 불완전하지만,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필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때가 차매’(갈 4:4), 곧 하나님의 예비하신 때가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율법 아래에서 속량하셨다. 이 속량(贖良)은 “대신 값을 치름”을 의미하며,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해 모든 죄값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루어졌다. 장재형목사는 이 ‘때가 찼다’는 바울의 표현을 주목하며, 구원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임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여자에게서 낳게 하신 것(갈 4:4)은 이사야 7장 14절의 예언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가 성취된 것이고, 구약의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완결을 맞이한다. 그 목적은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5). 즉, 인간이 자신을 아무리 율법으로 세우려 해도 연약함 때문에 온전히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예수님께서 법을 완성하시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단순히 죄 사함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됨이라는 신분 변화가 선물로 주어졌다고 말한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는 말씀은, 성령(그리스도의 영)이 임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음을 증언해주는 장면이다. 종은 주인을 두려워하고 멀리떨어진 존재로 바라보지만, 아들은 ‘아빠’라고 다정히 부를 수 있다. 이것이 아들과 종이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이다. 종은 시종일관 ‘법을 지켜야 함’이라는 긴장과 두려움 속에 있지만, 아들은 사랑의 유대관계 속에서 부모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지닌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만 얻을 수 있는 ‘종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전가된‘하나님의 의’를 붙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라”는 말씀과 직결된다. 지금 4장에서도 동일하게, 종 노릇하던 사람들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신 것은 우리 힘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재확인시킨다. 그리고 그 아들 됨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곧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보내시어 우리 안에 함께하심으로 가능한 실제적 교제 관계—를 부연 설명한다. 종교적 지위상승이나 단순한 호칭상의 변화가 아니라, 관계 자체가 회복된 것이다. 한편 갈라디아서 4장 7절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는 선언은 구원의 완결점을 보여준다. 아들인 이상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영적·역사적 축복을 상속받을 수 있다. 이것이복음이 주장하는 엄청난 급진성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율법 아래에서 같은 조건이 될 수 없었던 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갈 3:28). 그 아들ship의 권세는,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등함과 평등함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이는 전통적 사회질서가 인정하던 종과 주인의 구분, 남녀의 구분,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 등을 무너뜨리며, 교회를 새로운 공동체로 재탄생시키는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 내에서 율법주의자들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옛 방식으로 돌아가도록 교인들을 꾀었다(갈 4:10). 바울은 그것을 두고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종노릇하려 하느냐”고 질책한다. 초등학문은 인간이 스스로의 공로나 노력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종교적·철학적 시도 전부를 지칭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에게 복음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이미 다 이루어진 구원이며, 거기에 어떤 인간적 조건을 추가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은혜의 세계다. 율법적 요구나 의무를 자꾸 더하면 더할수록, 오히려 복음의 은혜는 무력화되고, 아들이 누려야 할 자유가 훼손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이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가 보여주는 복음의 핵심 정신을 “우리에게 주어진 아들의 정체성을 끝까지 붙들라”는 한마디로 요약한다. 아무리 교회가 조직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성숙해진다 해도, 만약 교인들의 마음속에 “아들로서의 정체성”이희미해지면, 결국 율법적 습관이나 세상적 가치관이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4장 후반부(갈 4:19-20)에서 바울은 그 사실을 절절히 토로한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바울은 교회 안에서 복음이 온전히 구현되고 아들 된 자유가 회복되기까지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수고하겠다고 강조한다. 갈라디아서 4장 중간 부분에서 등장하는 바울의 개인적 고백(갈 4:13-15)은, 바울이 얼마나 육체적으로 연약했는지, 그럼에도갈라디아인들이 그를 사랑으로 받아준 은혜로운 시절이 있었음을 회상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혹은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고, 심지어 눈이라도 빼줄 듯이 바울을 향해 헌신적 사랑을 보였다. 이는 복음 안에서 그들이얼마나 자유롭고 뜨거운 사랑으로 충만했는지를 말해주는 역사적 장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서로 이간질하고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에게 현혹되어 분열하고 미워하는가? 바울은 이 점이 너무나 안타까웠고, 그래서 거친 어조로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결국 갈라디아서 4장의 메시지는, 단지 “율법은 필요 없으니 완전히 버려라”는 피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율법이 지닌본래 목적—우리를 죄로부터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보호자적 역할—을 성취하게 만든 뒤에는, 더 이상 그것에묶일 필요가 없다는 매우 큰 자유 선언이다. 인간은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 단계에 이르나, 그 죄를 해결하고 아들이 되는 것은 율법을 더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량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들이 된 이후에는, 본질적으로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자유롭게 누리는 자가 되며, 서로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통해 율법의 완성이 무엇인지를 체험해가야 한다. 율법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사랑으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야말로 아들다운 삶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점을 자주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율법을 충족하는 종교인”이 아닌 “복음으로 자유케 된 아들”임을 잊지 말 것을 거듭 당부한다. 아들로서의 자유를 맛본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내가 아들을알고 아들이 나를 아신다”는 친밀함으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교회는 생명력 있는 공동체가 되고, 세상에 대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의 역동성이다. Ⅲ. 종에서 아들로 전환되는 자유와 정체성, 그리고 삶의 적용 바울의 개인적 체험과 갈라디아 교회 상황이 복합되어 나타나는 갈라디아서 4장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자유’와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율법과 복음, 종과 아들, 속박과 자유, 또 이를 방해하는 거짓 교사들의 문제 등이 생생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특히 “너희가 아들이면 유업을 받을 자”라는 그 놀라운 선언은 인간의 운명을 송두리째바꾸는 위대한 메시지다. 한갓 죄의 종에 불과하던 인간이 어찌 전능하신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기적이며, 복음이 주는 충격적인 은혜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눈여겨볼 점은, 바울이 “어떻게 아들이 될 수 있는가”를 말할 때 철저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일”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고, 아들의 영을 부어주신” 분은 하나님이다. 우리가 한 것은그저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공로나 율법적 행위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아들로 살아가는삶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가능해지는 능동적 삶이다. 즉, 아들은 이제 마음대로 방탕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써” 아들다운 거룩과 사랑을 나타낸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이 적용점을 자세히 풀어간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삶, 곧 사랑과 희락, 화평과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 절제가 흘러나오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더욱 실제적인 목회 현장에서 반복하여 강조한다. “복음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힘을 지녔고, 그 변화는 본질적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정체성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교회 내 성도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혹은 스스로 정죄받아 두려움에 빠지는 이유는, 많은 경우 “내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다. “종교적 의무를 다 해야만 안전하다”는 마음이 강해지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보다 규칙 준수와 형식이 앞서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서로를 비교하고, 서로를 판단하며, 또 다른 멍에를 만들어내기 쉽다. 갈라디아 교회가 직면했던 문제가정확히 이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확신할 때, 마치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 앞에서도 자신의 신분을 흔들리지 않고 선언하셨듯, 우리는 삶의 수많은 압박과 유혹 앞에서도 당당히 서게 된다. 그 정체성이 중심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자녀는 아버지의 풍성함을 알고 있고,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죄와 싸울 때도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확신을 품고 힘있게 살아간다. 당장의 상황이 힘들고 연약해 보여도, “그리스도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후12:9)는 바울의 고백처럼 오히려 우리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 영광이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 4장을 설교할 때, 바울이 자신의 육체적 연약함을 노출하고 갈라디아 교인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장면(갈 4:13-15)을 자주 언급한다. 바울이 그처럼 약해 보이는 존재였음에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눈이라도 빼어주려 할 정도로 뜨겁게 환대했다. 그것은 율법적 의무가 아닌 복음적 사랑에 근거한 태도였다. 그 아름다운 모습이 나중에 율법주의자들의침투로 인해 사라지고 말았으니, 바울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 우리도 교회 안에서 어떤 형제를 처음 만났을 때 복음 안에서누렸던 뜨거운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정죄하고 분열하는 모습으로 바뀔 때가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갈라디아서 메시지를 다시금 붙들고,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를 자문해봐야 한다.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다시 종으로 돌아가려 하느냐”고 간곡히 호소한다. 이것은 단지 옛 율법 체제로 돌아가는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약점과도 직결된다. 우리는 마음 한편에 늘 “착하게, 바르게, 법을 지켜야”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의롭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복음이 분명히 밝힌다. 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 믿음은 ‘아들의 관계’ 속에서 꽃피운다. 아들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마음을 알고, 그것을 순종으로 실천하면서도율법적 억압이 아닌 사랑의 동력으로 움직인다. 이 미묘한 차이가 종교적 삶과 복음적 삶을 가른다. 갈라디아서 4장을 오늘날 교회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면, 교회 안에 숱하게 들어온 “초등학문”적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의 방법론이나 심지어 기독교를 표방하는 율법주의적 가르침도 때로는 초등학문이 될 수 있다. 겉으로 볼 때 훌륭하고 선해보여도, 만일 그것이 십자가 은혜의 복음 위에 서 있지 않고, 인간적 의무와 성취만을 강조한다면 그 역시 우리를 종으로 만드는초등학문이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가차 없이 “다시 종노릇하려 하느냐”고 비판하며, 거짓 교사들이 교인들을 이간질하고 미움의 불씨를 퍼뜨리는 현실을 직시한다. 이간질과 분열, 거짓, 미움, 정죄는 복음이 지향하는 사랑과 자유와 정반대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 삶에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지키고 구현할 수 있을까? 먼저, 말씀과 기도로 늘 자신이 받은 구원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되었으니, 그 사실을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까지 깊이 새겨야 한다. 둘째로,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말하는 “아들의 영”은 바로 성령이시다.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할 때, 우리는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고, 그 친밀한 교제 속에서 세상에 대해 담대해진다. 셋째로, 우리의 자유가 곧 사랑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종교적 의무에 따라 형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진 대로 이웃을 섬기고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다. 그럴 때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 말하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는 말씀이 실현된다. 결국 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에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라고 한 데는, 아들됨의 실제가 성도 개개인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의 육체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를 “예수 그리스도 대하듯” 여기며 폭발적인 사랑을 보여주었던 때를 회상시키며, 그 시절의 사랑과 자유로 다시 돌아오라는 초대이기도 했다. 우리도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초심이 사라지고 형식과 습관에 길들여져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자기 의를 세우려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갈라디아서 4장의 메시지를 붙들어야 한다. 과연 나는 아들로서 자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시 종의 길로 퇴보하고 있는가? 장재형목사는 이 질문을 늘 가슴에 새기고, 교회 공동체와 개인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라고 권면한다. 복음은 한 번 믿고 끝나는교리가 아니라, 날마다 살아내야 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며, 아들의 영이우리 안에 거해야만 비로소 꽃을 피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오셔서 우리를 속량하셨고, 우리가 복음으로 살아갈때 모든 율법의 요구가 오히려 자연스럽게 성령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이 바울 신학의 정수다. 우리가 이를 잊지 않고 ‘자유함을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늘 성찰할 때, 교회 안의 분열과 거짓 가르침, 인간적 규범에 대한 집착 대신, 오히려 사랑과 성령의 열매가 충만한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다. 정리하자면, 갈라디아서 3장 23절부터 4장 7절까지 이어지는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종’과 ‘아들’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 복음의능력을 증언한다. “너희는 아들이다”, “아들이면 유업을 이을 자다”라는 그의 선언은, 교회가 다시 종의 멍에로 돌아가려는 어리석음을 꾸짖고, 한편으로는 새롭게 세워지는 아들로서의 자의식을 고취한다. 이것은 구약 역사 속에서 율법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가 진정한 아들ship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가 내포하는 복음적 정수와 은혜의 핵심을 놓치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성도들이 이 자유를 실제 삶에 적용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아들 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이나 의무감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놀라운 자리에 서 있다. 그 자유와 사랑의 관계를 날마다 누리고 증거하는 것이, 갈라디아서 4장이 오늘의 교회에 던지는 강력한 호소이자 기쁨의 초대다.

하나님의 자녀 됨  – 장재형목사

Ⅰ. 성령 안에 있는 자의 정죄 없음과 자유 로마서 8장은 복음의 핵심을 가장 장엄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장으로,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에게 오랫동안 깊은 영감을 주어온 말씀이다. 특별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는 시작구절은, 우리의 구원이 기초하고 있는 놀라운 진리를 선포한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 본문이 주는 은혜를 자주 … Read more

예루살렘 회의 – 장재형(장다윗)모사

1. 예루살렘 회의와 교회의 전통 –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예루살렘 회의(사도행전 15장)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신자들이나, 혹은 그와 다른 문화·전통을 가진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동일하게 구원받을 수 있느냐를두고 일어난 뜨거운 논의가 그 핵심이었다. 이 회의에서 사도들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만, 그리고 은혜로만”이라는 진리를 분명하게 천명했고, 이 결정을 통해 교회는 보편성을 지니면서도 지역과 전통적경계를 초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장차 세계 복음화의 기초로 작용하여, 수많은민족과 언어, 문화 속에 복음이 전해지는 역사의 길을 연 셈이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사도들이 한 결정을 ‘교회가 신앙과 직제라는 두 축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의믿음 위에서 해답을 내렸는가’를 보여주는 모델로 강조한다. 교회 내에서 이견이 생길 때, 오로지 자기 주장이나편견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과 장로들의 판단과 함께 기도와 말씀 중심의 분별을 반드시 거치며,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터 위에서 건설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교회의 아름다운전통이라고 본다. 곧, “믿음과 은혜”라는 구원의 기본 진리를 훼손하지 않되, 그 외에 예배나 봉사, 교제 등에서생길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은 기도하며 서로 합의해 나가는 과정을 거쳐야 교회의 연합과 확장이 가능하다고 본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예루살렘 회의가 끝난 뒤, 이방 교회들을 돌보러 다시 나서게 된다(행 15:36). 그들은 1차전도를 통해 씨앗을 뿌린 이방 교회가 잘 자라고 있는지를 ‘방문’하고, 그들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길을떠나기로 합의한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 신자들에게 더 이상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우지 말자’라는 결론을얻은 뒤에도, 실제로 그것이 교인들의 삶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방문이 필요했다. 이는 “씨를 뿌렸으니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야 하는 것처럼, 교회와 성도들을 지속적으로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일깨운다. 장재형 목사 역시 설교나 세미나를 통해 끊임없이 강조하는 부분이바로 이 ‘양육’과 ‘지속적인 돌봄’이다. 장재형 목사가 말하는 ‘교회성장의 비결’은 거대한 이벤트나 일시적인 열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후 그 영혼을 끝까지 책임지고 돌보려는 끈질긴 목양과 영적 보호에 달려 있다고 보는것이다.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얻는 구원을 더욱 실질적으로 누리게 하려면, 구원의 신비를 들은 그들이 시험과유혹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꾸준히 말씀과 기도로 양육해야 한다. 바로 그 ‘다시 방문하자’는 바울과바나바의 결의에 오늘날 교회성장의 영적 원리가 압축되어 있다. 예루살렘 회의의 핵심 결론 중 하나인 “이방의 형제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자”라는 결정은 교회의보편성을 확장하고, 복음 자체의 능력을 드러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결정이 실제 목회현장에서 결실을 맺으려면, 바나바와 바울 같은 지도자들이 각 교회로 돌아가서 그 결정 내용을 가르치고체화시키는 추가 과정이 필요했다. 장재형 목사가 평소 강조하는 부분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즉, 총회나 회의의결론이 아무리 아름답게 선포되었다 해도, 교회 현장에 그것이 뿌리내리고 열매 맺기 위해서는 ‘방문’과 ‘점검’을통한 꾸준한 목양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의 의의는 교회 공동체가 ‘믿음과 은혜’로 모이고, 교회법적 혹은 신학적 이슈가 생겼을 때, 함께 모여 기도와 토론을 통해 분별하고 합의하는 전통을 확립한 데 있다. 그리고 이 전통은 교회 역사의 흐름을관통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교회가 서로 연결되고, 함께 성장하며, 하나의 지체로서 움직이는 동력이 되어왔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라고 도전하면서, 교회가 오랜 선교 역사에서 구축해온 이러한‘신앙과 직제의 건강한 균형’을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2.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마가의 갈등과 화해의 영성 사도행전 15장 후반부에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생긴 갈등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도중 떠났던 마가(요한)도 다시 데리고 가서 기회를 주자고 주장했고, 반면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우리를 떠나어려운 사역을 함께하지 않았던 이(마가)를 데려가는 것은 옳지 않다”(행 15:38)라고 강경하게 반대했다. 결국둘은 ‘서로 심히 다투어’ 갈라서고(15:39),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사이프러스)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택하여 소아시아 지역을 돌며 교회를 세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교회의 큰 그림에서 보자면, 결코 파멸적인 분열이 아니라 더 큰 사역으로 확장되기위한 합리적 분기점이었다’고 해석한다. 바나바는 마가라는 ‘심약하지만 소중한 재목’을 포기하지 않고 돌보며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했고, 바울은 개척자적 소명에 굳게 서서 “임전무퇴”의 자세로 복음 전선의 최전방을파고들고자 했다. 누가 옳고 그르다는 2분법적 기준으로 이 갈등을 재단하기보다는, 두 사람 모두 교회를 위한진실한 열심을 가지고 다른 사역 방향을 택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 결과 바나바와 마가는 구브로에서 복음 전도를 지속하며, 훗날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이자 복음서기록자로서 ‘마가복음’을 남긴 인물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바울 역시 2차 선교여행에서 실라, 그리고 루스드라와더베에서 만나게 된 디모데 등을 동역자로 삼으며 소아시아를 넘어 유럽(마케도니아)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데성공한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놓고 두 사도가 갈등을 빚었지만, 그 갈등 이후 더 넓은 지역에 복음이퍼져나갔다. 그리고 종국에는 바울이 디모데 후서나 빌레몬서에서 마가를 필요로 할 만큼, 서로 다시 회복된 동역관계로 돌아오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사건에서 ‘교회 사역이 다를 수 있다는 것’과 ‘끝까지 사람을 붙들어 주는 마음’이라는 두 가지를중요한 교훈으로 삼는다. 첫째,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선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엄청난 불화”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한쪽은 험난하고도 적극적인 개척 현장으로, 다른 한쪽은 한 영혼을 세밀히 돌보며 재능을발휘하도록 하기 위한 섭리였다는 시각이다. 어떤 사람이 일시적으로 복음 전선의 최전방을 감당하기 어려울 수있고, 어떤 사람은 전장에 서기에 충분한 체력과 결심, 단호함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다양한 사람들을 각자의 길로 이끄시며 결국 복음을 확장하신다. 둘째, 바나바가 보여준 모습은 ‘낙심한 영혼을 붙들어 주는 목자다움’이다. 처음 바울을 예루살렘 공동체에소개해주고, 그를 사도로 인정받게 하는 데 도움을 준 이도 바나바였다(행 9:27). 그리고 나약해 보이는 마가를껴안고 다시 기회를 주어 훗날 복음서 기자로 성장할 수 있게끔 인도한 이도 바나바였다. 누구나 강점과 약점이있는데, 바나바는 상대방의 가능성에 주목하여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점을 현장목회에 적용하여, 교회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나거나 누군가가 상처받고 떠난 경우에도, 끝까지 그 사람을 향한교회의 책임감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거듭 가르친다. 마침내 바나바와 바울의 갈등을 통해, 교회는 단순히 ‘이긴 사람과 진 사람’의 패턴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각각의 역할이 달라도 하나의 몸으로 완성되는 구조임을 볼 수 있다. 교회를 위협하는 더 큰갈등은 서로의 비방과 분열이지만, 이 장면에서 드러난 갈등은 ‘사역 노선의 분기’였고, 결과적으로는 확장된선교와 훗날의 화해, 그리고 마가복음이라는 놀라운 결실을 낳았다. 이를 두고 장재형 목사는 “그리스도의 몸은부서지지 않는다. 갈등은 있지만 더 크게 하나 되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고 말하며, 만일 교회가 서로에게 상처만주는 ‘파멸적 분열’로 가버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결국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함께할 때, 어느 갈등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회복과 확장을 위한 통로가 될 수 있다는것이다. 3.개척, 돌봄, 그리고 성령의 인도 – 선교의 미래 바울 일행은 제2차 전도여행을 위해 떠나면서, 소아시아 여러 지역(수리아·길리기아 등지)을 다니며 교회를‘굳게 세운다’(행 15:40~41). 그들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교리적·실천적 지침들을 전달하고, 믿음 위에 굳게서도록 격려했다. 이러한 과정은 교회의 질적 성장을 이끌어내고, 날마다 숫자가 더해지는 부흥의 열매로이어졌다(행 16:5).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신앙과 직제를 잘 지키면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한다”라고역설하는데, 그것은 초대교회가 경험한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바울은 계속해서 아시아 지역(당시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서부)에서 말씀을 전하고자했으나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행 16:6)라는 구절이다. 그리고 이어서 “무시아 앞에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16:7)라고 증언한다. 바울은 사역 의욕이누구보다 넘치는 인물인데도, 성령과 예수의 영이 막으시면 멈추어야 했다. 결국 드로아로 내려갔을 때,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16:9)라고 간청하는 환상을 보게 되고, 바울은 유럽대륙(마케도니아 지방)으로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이처럼 ‘성령의 인도’를 잘 따르는 것이야말로 교회 개척과 선교 사역의 본질적 동력이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일행의 마케도니아 진출을 두고, “하나님께서 더 큰 대륙, 더 큰 세계로 복음을 퍼뜨리길 원하셨다”고 해석한다. 바울은 인간적 열심으로는 아시아 지역을 모두 선교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보다 더시급한 영혼들이 있는 유럽 대륙으로 빨리 건너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을 ‘길 막힘’이라는 형태로이끄셨고, 결국 환상을 통해 분명한 지침을 주셨다. 이는 오늘날 교회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문을 여시고닫으시는 섭리에 기민하게 순종해야 함”을 보여주는 본보기다. 장재형 목사는 종종 현대 교회를 ‘Acts 29를 써 내려가는 교회’라고 일컫는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나지만, 교회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이후에도 성령께서 계속 교회를 인도하고, 복음이 땅끝까지 확장되고 있기때문이다. 사실상 오늘을 살아가는 교회가 사도행전 29장, 30장을 이어 쓰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예루살렘 회의로 대표되는 ‘공동체 합의와 결단’, 바나바와 바울 갈등 사건으로 대표되는 ‘갈등 속에서도 더 큰확장으로 나아가는 은혜’, 그리고 마케도니아 환상으로 대표되는 ‘성령의 구체적 인도’ 등은 모두 Acts 29 교회를건설하는 핵심적인 원리로 작용한다. 특히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개척 열정만 갖고 열심히 움직이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개척지마다 성도를끝까지 돌보고 양육할 계획을 세워야 하고, 현지 교회가 자립할 수 있도록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바울이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행 15:36)라고 한 것과일치한다. 만일 교회를 세워놓고 그대로 방치한다면, 부모가 자식을 낳아놓고 돌보지 않는 것과 똑같이 무책임한일이 된다. 결국 전도와 개척 이후에는 필연적으로 ‘돌봄’과 ‘지속적 목양’이 뒤따라야 하고, 그 모든 과정을성령께서 친히 주관하신다. 이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교회를 확장해가다 보면, 때로는 예기치 못한 갈등이나 막힘에 부딪힐 때가 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막혔던 것처럼, 길이 닫히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 현대적 맥락에서 보면, 지역의 정치적변동, 국제정세 문제, 비자 발급 문제, 현지 공동체 내 갈등 등 다양한 요인으로 막힐 수 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막힘이 곧 끝이 아님”을 누누이 언급한다. 막힌 곳에는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교회가 이어서 들어갈준비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는 더 절박한 어느 지역으로의 문을 이미 열어두셨을 수 있다. 그러므로교회 개척자들은 막힘 앞에서 낙심하기보다, 어디선가 열려 있을 새로운 문을 찾아 “Moving Forward” 해야 한다. 결국 믿음의 공동체는 “믿음으로만, 은혜로만”이라는 구원의 진리를 중심 축으로 삼고, 교회 내 갈등이 생길 때는기도와 합의를 통해 서로를 세우며,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아가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교회는자라나고, 더 넓은 지역으로 복음이 확장된다.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을 따라 구원의 본질에 집중하면 율법으로사람을 얽매지 않게 되고, 바울과 바나바 갈등 속에서 사람을 끝까지 붙들어 세워주는 사랑의 모습이 나타나며, 궁극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가 어떤 문화와 국경도 초월해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사도행전이전하는 메시지다. 장재형 목사는 이처럼 사도행전 15~16장의 메시지를 현대 교회에 적용하며, “예루살렘 회의와 같은교리적·공교회적 결정과 전통을 존중하되, 이를 실제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마가와 같은다양한 인물들의 역할이 모두 필요하다. 그 속에서 갈등이 생길 수 있으나 결코 파멸적 분열로 치닫지 않고, 오히려 복음의 지경을 넓혀가는 은혜가 있다. 그 중심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순종하는 영성이 있어야교회가 Acts 29를 계속 써 내려갈 수 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교회가 30주년을 맞이했든, 50주년을 맞이했든, 혹은 이제 막 개척된 지 얼마 되지 않았든, 이러한 원리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란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자, 동시에 “부름받은 사람들을 부르러 가는 사명 공동체”다.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구원을 얻은 백성이 서로 돌보고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증언할 때, 그 한가운데서 성령의인도가 역사한다.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 바나바와 바울의 분기, 그리고 마케도니아 환상으로 상징되는 사도행전15~16장의 사건들은 모두, 교회가 늘 과거의 회의나 결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상황 속에서 “계속해서선교의 장을 확장해 나갈 것”을 촉구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제 새로운 시대가 왔다. 다섯 대양과 여섯 대주가 우리의 교구가 되었다”라고 말하며, 과거와는비교할 수 없이 빠른 교통·통신 수단, 다양한 문화 교류의 기회가 열려 있는 오늘날이야말로 교회가 성령의인도하심을 더욱 민감하게 따라 움직여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동시에, 해외에 파송된 많은 선교사와 개척교회들이 그냥 외롭게 있도록 두어서는 안 되며, 예루살렘 회의 이후 바나바와 바울이 각 교회를 찾은 것처럼, 끊임없이 방문하고 양육하고 격려해야 한다는 점도 상기시킨다. 그래야만 “끝까지 붙들고 사랑하신”(요 13:1) 주님의 모습이 교회를 통해 드러나고, 그때 교회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꺾이지 않는 복음의 능력을 증언할 수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도행전의 역사와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실 사이에는 많은 시공간적 차이가 있음에도, “믿음으로만, 은혜로만”이라는 구원의 본질, “갈등을 통해 더 넓게 확장되는 교회”라는 영적 원리, “성령의 구체적인인도하심을 따른 개척과 돌봄”이라는 세 가지 축은 변함없이 유효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우리의 실제 목회와선교, 그리고 교회의 미래 로드맵 안에 녹여낼 것을 도전하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는 전진을 멈추지않는다. 갈등하더라도 더 큰 연합으로 귀결될 것이고, 막히더라도 다른 문이 열릴 것이며, 끝내 모든 열방이 주를아는 지식으로 충만케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렇게 예루살렘 회의부터 시작된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21세기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그 전통 위에 현대 교회가 굳건히 서서 세계 곳곳의 영혼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것이, 곧 사도행전이 ‘열린 결말’처럼 우리에게 제시하는 ‘Acts 29의 도전’이다.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생들이 탐구하는 편집: 기술 그룹만큼 태도

오늘날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OSMC(Olivet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의 저널리즘 학생들은 편집 및 뉴스 판단 수업에서 뉴스룸에서 편집자의 역할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이들은 편집자가 뉴스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편집자는 기사가 발행되기 전에 내용의 정확성, 공정성, 윤리성을 유지하기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특히 … Read more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ESL 학생들은 가을 분기에 영어 능력 요건을 충족합니다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ESL 가을 분기 학생들이 TOEFL iBT 시험을 통과하고 원하는 학위 프로그램에서 요구하는 점수를 달성했습니다. “이번 분기에 영어 능력 요건을 충족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Lisa Bare 선생님의 수업과 지도에 정말 감사합니다. 도전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한 여정이었습니다.”라고 Meiling Lai가 말했습니다. “Lisa 선생님은 우리에게 어휘, 읽기, 듣기를 집중적으로 훈련시켜 주셨습니다. 저는 많은 책을 읽음으로써 어휘력을 확장할 … Read more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학생들은 기독교 수업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묵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역사의 주인이시다.” – 이 말은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신학교(OTCS)의 겨울학기 기독교사 과정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이 과정은 주로 오순절 창립부터 현대까지의 기독교 교회 역사를 탐구합니다. 사도 시대부터 중세, 현대 기독교에 이르는 교회 내부와 외부의 주요 사건, 인물, 다양한 추동력을 다루며, 기독교의 역사를 깊이 있는 관점에서 살펴봅니다. 학부생인 수잔 타오는 현재의 …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