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은 자유인, 자유인은 그리스도의 종: 장재형목사의 고린도전서 7장 해석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때로 우리를 깊은 사색과 동시에 당혹스러운 질문 앞으로 이끈다. 문장은 단호하고 직선적이지만, 다루는 현실은 복잡하고 다층적이어서 단락을 넘어갈 때마다 새로운 문제의 결이 드러난다. 그래서 어떤 독자에게는 바울의 논리가 비약적으로 보이거나, 서로 무관해 보이는 주제가 불쑥 끼어드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장재형(장다윗)목사는 바울이 결코 즉흥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며, 모든 권면의 뒤편에는 분명한 의도와 목회적 목적이 놓여 있다고 강조한다. 각 구절은 거대한 직소 퍼즐의 한 조각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한 그림을 이루고, 그 중심에는 복음이 세상의 질서를 전복해 새 창조의 질서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자리한다.

이를 가장 생생히 보여 주는 사례가 고린도전서 6장의 ‘세상 법정’ 문제다. 음행을 준엄하게 책망하던 바울이 왜 갑자기 성도 간 송사 이야기를 꺼내는가.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단순한 주제 나열이 아니라, 고린도라는 도시의 현실과 교회 내부의 상처가 깊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항구도시 특유의 퇴폐적 풍조가 교회 안에도 스며들어 가정이 무너졌고, 어떤 이들은 이러한 영적·도덕적 사안을 믿지 않는 재판정으로 가져가 세상의 잣대로 판결받으려 했다. 바울의 질책은 교회의 치부를 세상 앞에 내어 보이며 그 가치관에 기대려는 태도를 겨냥한다. 동시에 사회적 불의로 억압받는 이가 정의를 위해 사회법의 보호를 받는 일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요지는 ‘교회 내부의 영적 사안’을 세상 프레임에 넘겨 판단받지 않도록, 교회 질서와 영적 권위를 회복하라는 데 있다. 이렇게 문맥을 따라가 보면, 단절된 듯 보이는 단락이 한 중심 원리로 유기적으로 수렴함을 확인하게 된다.

이 열쇠는 고린도전서 7장 21–24절의 난해 구절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결혼과 이혼, 독신과 과부 문제를 섬세히 다루던 바울은 왜 ‘종과 자유’라는 사회적 의제를 불쑥 끌어오는가. 장재형목사는 ‘종’(δοῦλος)이라는 단어의 시대적·문맥적 다의성에 주목한다. 로마 사회에서의 ‘종’은 문자 그대로의 노예만이 아니었다. 많은 여성들이 법적 권리에서 배제되고 가정 내 권력 구조에서 열세에 놓여, 제도와 관습 속에서 사실상 종과 같은 처지로 취급받았다. 그러니 바울이 ‘종’을 말할 때, 고린도 신자들에게는 최하층 계급인 노예의 형상과 더불어, 가정 안에서 억눌린 여성의 모습이 자연스레 겹쳐졌을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의 천재적인 목회적 지혜를 본다. 가정 문제의 연장선에서 ‘종’의 이미지를 호출해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신음하는 모든 이—특히 여성 성도—에게 하늘의 위로와 가치 전복의 복음을 동시에 선포하는 것이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고전 7:21a). 이 짧은 문장은 사회적 신분으로서의 노예에게 직접적인 위로이면서, 억압적 관계 속의 아내나 사회적 약자에게 “현재 상태가 너의 존재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정체성의 선언이 된다. 이어지는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7:21b)는 구절은 숙명론을 거부하게 만든다. 기회가 주어지면 더 나은 상태를 ‘사용’하라—곧 소명에 합당한 자유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행하라는 권면이다. 여기서 ‘자유’는 단지 신분 상승이 아니라, 복음이 허락한 행위의 자유, 의의 도구로 선택할 자유다. 바울은 피해의 문법에서 소명의 문법으로 독자를 이끌어 내린다.

핵심은 22–23절에 응축되어 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자유자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라.” 세상의 위계가 뒤집힌다. 비천한 종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권력도 빼앗을 수 없는 자유를 이미 소유하고, 세상의 자유인은 그리스도께 붙들린 순간 기꺼이 복종의 길을 택한 ‘종’이 된다. “너희는 값으로 산 자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7:23)는 경고는, 지위 고하와 상관없이 인간의 평가와 기대, 문화적 프레임에 다시 예속되지 말라는 호소다. 복음은 자유를 준다. 그리고 그 자유는 섬김으로 형상화될 때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된다.

이 전복의 논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뿌리를 둔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께서는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라”고 하셨다. 세상 권세는 힘으로,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섬김으로 드러난다. 십자가의 길로 낮아지신 그리스도께서 이를 몸소 증명하셨고, 바울은 그 정신을 고린도 교회의 구체적 상황에 번역해 억압받는 자들의 운명을‘영적 자유’로, 자유인의 특권을 ‘그리스도의 종 됨’으로 재해석하며 공동체 안에 새로운 관계 윤리를 심는다.

그렇다고 바울의 권면이 가정의 신성함을 무화시키는 급진적 파괴는 아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응답하셨다. 모세의 이혼 규정은 ‘완악함’을 제어하기 위한 임시적 안전장치였을 뿐, 창조 질서의 원형은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소명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여성의 인격을 동등한 파트너로 회복시키는 복음의 선언으로 읽는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관계를 소유와 거래의 틀에서 해방시켜, 언약과 섬김의 틀로 복원하라는 명령이다.

7장 후반부 권면은 임박한 종말 의식이라는 시대적 공기를 전제로 한다. “때가 단축되었다”(7:29)는 말은 일상의 가치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선택의 우선순위를 하나님 나라로 재배열하라는 요청이다. 결혼은 축복이면서 염려를 동반하고, 독신은 헌신의 집중도를 높여 주는 은사로 제시된다. 바울은 결혼을 폄하하지도, 독신을 강제하지도 않는다. “너희 유익을 위함이요,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7:35). 요체는 주를 기쁘시게 하려는 ‘나뉘지 않은 마음’이다. 오늘 교회가 이 원리를 잃으면 제도는 남고 능력은 사라진다. 반대로 이 원리를 붙들면 어떤 삶의 상태에서도 소명이 빛난다. 개혁교회 전통과 달리 서원과 독신을 택한 이들이 있더라도, 장재형목사는 교파를 넘어 온 존재를 주께 바치려는 그 헌신의 영성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열린 태도를 권한다. 핵심은 제도가 아니라 분할되지 않은 사랑이다.

현실 적용에서도 바울의 구분은 날카롭다. 교회 내부의 영적·도덕적 사안은 먼저 공동체의 영적 권위와 질서 안에서 다루어야 한다. 동시에 교회 밖에서 개인이나 공동체가 불법과 폭력의 피해를 당했다면, 정의를 위한 공적 법의 절차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의 한 부분이다. 약자 보호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며, 침묵의 강요는 복음이 아니다. 바울의 권면은 피해자에게 침묵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경고로 부당한 구속과 두려움의 쇠사슬을 끊고 진리 안에서 자유로 서라고 부른다. 교회는 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치유하며 정의가 흐르게 하는 안전지대가 되어야 한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바울은 왜 가정 지침 사이에 ‘종과 자유’를 끼워 넣었는가. 장재형목사의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생활 규정 모음집’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한 원리—“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7:24)—를 삶의 모든 국면에 대입해 보여 준다. 이것이 유기적 서술이다. 신분, 성별, 혼인 여부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본질적 표지가 아니다.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임재를 막지 못하고, 어떤 결핍도 소명을 상실케 하지 못한다. 바울은 상황을 해체하기보다 의미를 재해석해 현실의 골짜기에 복음의 길을 연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분명하다. 첫째, 관계의 권력 지형을 복음으로 재구성하라. 강한 자는 낮아져 섬기고, 약한 자는 자유를 ‘사용’하여 존엄하게 일어서라. 둘째, 선택의 우선순위를 종말론적 시선으로 재배열하라. 결혼이든 독신이든, 직장이든 사역이든, 마음이 나뉘지 않게 하라. 셋째, 교회는 공적 정의와 내적 거룩의 바른 경계와 교차점을 세워 약자를 지키고 죄를 미워하며 회복을 도우라. 넷째, 인간의 평판과 문화의 기대에 다시 예속되지 말고 “값으로 산 자”로서 오직 주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라.

무엇보다 이 모든 권면 위에 덮인 복음의 하늘을 보라. 종은 자유인이요, 자유인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역설은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된 교환—그분의 낮아지심과 우리의 높아짐, 그분의 갇힘과 우리의 해방—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자유는 자기실현의 무기가 아니라 자기비움의 통로이며, 섬김은 자기 상실의 비극이 아니라 참된 자아 회복의 길이다. 복음은 우리를 ‘상태’에서 ‘관계’로, ‘처지’에서 ‘소명’으로 옮긴다. 그리고 그 소명은 바로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이것이 바울이, 그리고 장재형목사가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최종 메시지다.

이 말씀이 가정과 교회를 흔드는 문화의 파도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는 반석이 되기를, 억압과 두려움의 그늘에 있는 이들에게 단단한 위로와 담대한 출구가 되기를,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자유와 섬김의 권세로 우리의 일상이 새로워지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주를 사랑하고, 오늘의 관계와 일과 선택을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맞추어 재구성할 때, 고린도전서의 낯선 난제는 더 이상 해석의 벽이 아니라 우리를 앞서 인도하는 살아 있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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