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러라 – 장재형(장다윗)목사

Ⅰ.  “사랑을 외면한 배반의 자리”

요한복음 13장 20-30절에서 나타나는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라는 장면은 겉으로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 같지만, 그 이면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이 본문을 놓고,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배반의 심리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눈앞에 있음에도 끝까지 붙들지 못하는 완악한 마음이 결국 어떤 파국을 낳는지에 대해 자주 강조한다. 여기서 “밤”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둠의 세계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버린 인간의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길을 선택한 유다는 바로 그 “밤” 속으로 나아갔는데, 이는 교회 생활이나 신앙 경력이 오래된 이들에게도 여전히 경종을 울리는 사건으로, 장재형목사는 “우리 역시 언제든지 배반의 자리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거듭 상기시킨다.

실제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함께하시면서, 유다의 배반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부르시고, 심지어 돈궤까지 맡기셨으며,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가까운 자리에 유다를 앉히셨다. 이는 유다로 하여금 끝까지 돌이킬 기회를 주고자 하신 예수님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유다는 그 사랑을 ‘자신의 계산과 욕망’을 극복하는 동력으로 삼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거래 대상으로 삼기에 이른다. 그 결과 “밤이러라”라는 짧은 구절이 유다의 비극적 결말을 예고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사랑은 언제나 우리 코앞에 있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렇듯 유다의 배반은 단지 ‘역사적 사실’이나 ‘특수한 악인’의 전형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음성을 듣고, 이적과 기적의 현장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한 사람이었다. 교회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는 “열심 있는 신자”처럼 보이는 사람이었고, 일정 부분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공동체 안에서 핵심 멤버로 알려진 이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납득하지 못한 부분이 쌓여 있었다. 예수님의 행보가 세상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자, 유다는 주님을 점점 의심하게 되었고, 재정적으로 넉넉지 않아 보이는 사역 스타일이 비효율적이라고 여겼으며, 결국 돈궤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 나아가 주님을 돈과 바꾸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장재형목사는 “배반은 결코 한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사소한 불만과 탐심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을 때 그것을 방치하면, 어느 순간 우리도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떨어진다”고 경고한다.

요한복음 13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것은 곧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사역자들을 잘 대접하고 존중하라는 권면으로 읽힐 수 있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셨을 때, 그 사랑을 너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라는 근본 질문을 던지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 직후에 예수님은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하시며 배반을 예고하신다. 가장 풍성한 사랑의 식탁, 곧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이런 극단적 배반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반전되는지 선명히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아무리 은혜로운 예배와 성찬을 함께 나눈다 해도 결국 어떤 이에게는 그 사랑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문을 닫고 배반의 길로 향하는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유다가 최후까지 돌이키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유다에게 건네시는 행위를 통해 “마지막으로 돌이킬 기회”를 주셨으나, 유다는 그 떡을 받고 곧바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요한은 “밤이러라”라고 기록함으로써, 시간적으로도 어두운 밤이었을 뿐 아니라 유다의 영혼 또한 어둠 속에 잠긴 상태로 들어갔음을 상징적으로 전달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안에서 우리는 자주 성찬을 나누고 떡과 잔을 나누며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지만, 정작 누군가는 그 사랑 앞에서 완악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교회의 의식과 전통을 따른다고 해서 자동으로 구원과 사랑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일깨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자기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그것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다. 즉, 유다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는 제자 공동체 내부에서도 파악하지 못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을 “교회의 영적 무관심”이나 “서로를 깊이 살피지 않는 태도”를 반영하는 모습으로 해석한다. 외형적으로는 함께 밥을 먹고, 사역을 나누고, 가까이 있는 듯 보이지만, 누군가가 속으로는 의심과 불신, 불만과 갈등을 키우고 있어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겉으로만 친밀하고 열심 있어 보이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유다 같은 이가 홀로 배반의 길로 빠져들 때 아무도 돕지 못하고 방치할 위험이 크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교회는 언제나 깨어 서로의 영적 상태를 살피고, 사랑을 실제적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유다가 배반에 이르는 과정은, 결국 “사랑을 사랑으로 보지 못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었을 때, 유다는 그 아름다운 헌신을 ‘낭비’로 보았다. 주님의 아낌없는 사랑의 행위를 세속적 가치로 재단해 버린 것이다. 이런 태도는 현대 교회 안에서도 이어진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말씀에 전심으로 순종하며 헌신의 옥합을 깨뜨리지만, 또 다른 이들은 “이게 과연 현실에 도움이 되겠느냐?”는 냉소로 반응한다. 그러다 보니, 사랑 자체를 하나의 이상론으로 치부하고, “내게 실질적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만 내려버리면, 누구든지 쉽게 등을 돌릴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순간이 “배반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게다가 이런 배반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유다가 스승을 은 삼십에 팔기로 결심하기까지, 내면에서는 작은 균열이 점차 커졌을 것이다. 애초에 예수님을 왜곡되게 바라보는 시선, 재정적 욕망, 세상적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예수님 행보에 대한 불만이 결합되어, 결국 극단적인 결정에 이른다. 이는 우리의 일상 신앙에서도 동일하다. 사소한 의심을 방치하면 불만이 되고, 불만이 쌓이면 교회를 비판하게 되며, 비판이 깊어지면 정죄와 배반이 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교회 안에서 마음 한구석에 맺힌 작은 상처나 의심이라도, 성령의 조명 아래에 내놓고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방치된 부정적 감정은 언젠가 돌아올 수 없는 지점으로 사람을 밀어버리기 때문이다.

“밤이러라”라는 표현은 이런 배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빛과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떠나 어둠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영혼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절망과 죄의 그림자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신앙의 틀 안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릴 수 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세속적 욕망이 들끓고, 마음문이 굳게 닫혀 사랑의 빛을 거부하는 상태가 될 수 있다. 결국 “밤”으로 나간다는 것은, 나름대로 ‘종교적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길을 배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장재형목사는 “밤으로 나가는 발걸음이 우리 안에서 시작될 때, 성령께 도움을 구하여 멈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후의 순간에라도 끝내 돌이키지 못할 위험이 있다”고 강력히 경고한다.

이러한 배반이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날 때, 그 파괴력은 더욱 크다.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은 외부 공격이기에 예상 가능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내부에서 신앙을 고백하던 이가 돌연 배반을 택하고, 심지어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에 앞장서면, 그 공동체는 큰 상처를 입는다. 주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던 유다가 배반의 아이콘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이 현실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그래서 “사랑을 외면한 배반의 자리”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가 유념해야 할 잠재적 위협인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외면한 배반”은 어둠을 향해 가는 길이지만, 그 길을 선택하지 않고 돌이킬 수 있는 길이 늘 열려 있다고도 역설한다. 문제는 인간이 그 길을 끝까지 붙들지 못하는 완고함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배반의 길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공동체를 보호할 수 있는가. 장재형목사는 먼저 “내 마음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정말 믿고 수용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으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사랑이 거칠고 때로 비효율적으로 보인다고 판단되는 순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정적으로 낭비’처럼 느껴지고, 또 어떤 이에게는 ‘세상이 요구하는 명성이나 힘과 달라서’ 답답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배반이 시작된다”는 말씀이 우리를 깨우쳐 준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치관, 복음의 원리가 세상과 부딪힐 때, 오히려 그분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어둠이 아닌 빛 안에 거해야 한다. 그렇게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할 때, 배반의 씨앗은 뽑혀 나가고, 사랑의 뿌리가 자라난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 13장 20-30절에 등장하는 “밤이러라”라는 표현은 시간적 어둠을 넘어서 영적 어둠, 곧 배반과 죄로 물든 인간의 완고함을 드러낸다. 유다는 삼년간이나 예수님과 동고동락했고, 돈궤를 맡을 정도로 신뢰받았으며, 최후까지도 예수님 곁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단지 ‘내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일’로 치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결국 배반의 길을 걷고 말았다. 오늘날 교회생활을 오래 한 성도나 직분자들에게도 똑같은 위험이 도사린다. 겉으로는 열심 있고 경건해 보여도, 마음 한구석에 “이 길이 정말 유익할까?”라는 의심과 탐심을 품고 있다면, 언젠가 “밤”으로 나가 버릴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늘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점검하고, 작은 죄와 불신이라도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결국 “사랑을 외면한 배반의 자리”는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고, 누구에게나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유혹이기 때문이다.

Ⅱ. “마지막 권면과 인간의 완고함”

요한복음 13장 27절에서 예수님은 떡을 받은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단순히 빨리 일을 처리하라는 재촉이나 조롱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미 유다가 배반의 결심을 굳혔음을 알고 계셨고, 그 끝이 파멸로 이어질 것도 아셨다. 그러나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 끝까지 돌이키지 않을 때, 예수님께서 억지로 막아서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이 구절이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해석하면서, “사랑은 결코 강제할 수 없으며,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억압해서 변화시키지 않으신다”고 자주 말한다.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유다의 선택을 강제로 막고 돌이키게 하실 수도 있었으나, 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유다는 마지막 권면을 외면하고 어둠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곧 나가니 밤이러라”라는 말씀을 따라갔을 때, 그 밤은 물리적 시간이기도 하지만 영적 실체이기도 하다. 유다가 사랑의 빛을 버리고 자기 어둠을 택했을 때, 예수님은 더 이상 그를 붙들지 않으셨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이 “인간의 완고함”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극명히 보여 준다고 역설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좋은 말씀과 예배, 뜨거운 찬양과 성찬을 경험하면서도, 내 마음을 닫고 “이 길은 나와 맞지 않는다”거나 “내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지어 버릴 수 있다. 그리고 끝까지 그 길을 고집한다면, 주님의 마지막 권면조차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이렇게 완고함이 극에 달하면, 결국 사탄은 그 마음에 침투해 더 깊은 죄와 파멸로 몰고 간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나서도, 후회를 느꼈지만 “참된 회개”로 돌이키지는 않았다. 단순히 후회만 하던 유다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함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후회와 회개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후회는 내가 잘못했음을 어렴풋이 깨닫고 괴로워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 죄에서 떠나 주님께로 돌아가겠다는 결단을 포함하지 않는다. 반면 회개는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며, 다시는 그 길을 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음에도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지만, 유다는 후회에 머무른 채 사탄의 꾐에 사로잡혀 절망을 택했다. 이는 인간의 완고함이란 것이 얼마나 자기 파멸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극명한 대비이다.

교회 안에서 맡은 직분이나 사역이 오히려 죄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 유다는 돈궤를 맡았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그를 신뢰하시고, 동시에 사명을 통해 성장하기를 바라신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직분을 통해 재정적 이익을 얻을 기회로 삼았고, 예수님 사역 전체를 “돈”의 관점으로만 바라보았다. 그 결과 “돈궤를 맡은 사람이 주님을 파는” 극단적 모순이 발생했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에서 “교회가 부흥하고 은사가 풍성해질 때, 그 은혜의 도구들을 세속적 이익으로 바꿔치기하려는 유혹이 강해진다”고 종종 말한다. 직분자나 사역자가 재정이나 권위를 오용하면, 그것이 ‘내부 배반’을 일으키는 직접적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더더욱 깨어 있어야 하고, 특별히 리더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권한과 책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늘 성찰해야 한다.

“마지막 권면과 인간의 완고함”이라는 주제는, 사순절에 깊이 묵상해야 할 핵심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기 직전에, 제자 공동체 안에서 가장 극단적인 배반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중대한 영적 교훈을 준다. 교회가 아무리 은혜로운 사역을 하고,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모여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 어떤 이의 마음은 완전히 닫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서 이미 사탄이 틈을 타고 있을 수도 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아무리 성례와 말씀으로 충만해 보여도, 스스로 깨어 있지 않으면 공동체 내부에서 가장 치명적인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겉으로는 화려한 예배와 열정적인 봉사가 이루어지지만, 정작 누군가는 배반의 마음을 품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완전히 사탄에게 넘어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때 주님은 여러 번 권면을 보내신다. 말씀을 통해, 예배와 기도를 통해, 동역하는 성도들의 사랑어린 충고를 통해, “돌아오라, 마음을 열어라, 내가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음성을 끊임없이 들려주신다. 문제는 그 음성을 들으면서도 완고함을 내려놓지 않으면, 결국 유다처럼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는 마지막 선언을 듣게 된다는 점이다. 즉, 주님은 사랑으로 강권하시되, 우리의 자유 의지를 무시하고 억압하시지는 않는다. 끝까지 돌이키지 않겠다면, 결국 떠나도록 내버려 두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사랑의 아픔이자 하나님의 존엄성”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로봇처럼 인간을 조종하지 않으시고, 진정한 사랑의 교제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끝내 마음을 닫으면 그 선택마저 존중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는 너무나 비극적이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내부 배반은, 다른 성도들에게도 깊은 혼란과 상처를 준다. 아직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는 “교회가 이런 곳이었나?”라는 극단적 실망을 안겨주고, 심지어 공동체 자체가 분열되어 갈라지는 아픔을 겪는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초대교회 때도 다양한 배반과 분열의 위험이 존재했으나, 그때마다 사도들이 깨어 기도하며 서로를 돌봄으로 극복했다”고 말하며, 현대 교회 역시 배반의 씨앗이 싹트지 않도록 먼저 서로를 살피는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권면한다. 그저 “열심으로 보이니 잘 지내겠지”라고 넘어가서는 안 되고, 실제로는 누군가 의심과 불만에 사로잡혀 무너져 가는지, 혹은 세속적 욕망에 빠져 교회를 이용하는지 깊이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권면과 인간의 완고함”은 우리 모두가 직면할 수 있는 현실적 문제다. 교회가 은혜 가운데 있어도, 누군가는 그 은혜를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이라 하여 거절할 수 있다. 그리고 계속 그 마음을 고집한다면, 언젠가 주님께서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라고 하실 만큼 더 이상 붙들 수 없는 지경이 온다. 그 후에 남는 것은 밤의 어둠뿐이다. 은혜와 사랑의 손길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등을 돌린 자에게 기다리는 것은 실존적 파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서 내 안에 완고함이 자라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한 번의 예배나 수련회, 혹은 강렬한 체험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것은 안일한 생각이다. 마음의 완고함은 교묘히 돌아오고, 계속해서 다른 형태로 우리를 흔들기에, 장재형목사는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의 사랑을 다시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교회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마지막 권면”이 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의심이나 불만이 들어서 방황하는 지체가 있다면, 그가 완전히 배반의 길로 치닫기 전에 돌아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사랑으로 충고하고, 기도로 중보하며, 실제적인 관심을 보여 주어 그 마음이 더욱 강팍해지지 않도록 돌봐야 한다. 만약 이러한 돌봄과 사랑의 수고가 없다면, 결국 공동체 내부에서 유다와 같은 비극이 반복될 수도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서로의 영혼을 맡은 동역자”라고 부르면서, 교회가 단순히 한 건물 안에 모여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사랑의 공동체여야 함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완고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다의 배반은 분명히 끔찍한 죄이자 예수님을 고난으로 몰아넣은 직접적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 배반과 고난 가운데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며, 인류 구원을 완성하셨다. 이는 인간의 악조차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악을 저지른 개인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유다는 자신의 죄값을 치르며 파멸했고, 그 죗값을 후회하되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절망의 길을 선택했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뜻은 어떤 식으로든 이뤄지지만, 우리가 그 뜻에 순종함으로 쓰임 받을 수도 있고, 거부함으로써 심판받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자유 의지로 인한 무거운 책임이자,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경고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유다의 예를 통해, 마지막 권면의 순간에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완고함이 가져올 결과를 분명히 깨닫고, 더는 방치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Ⅲ.  “회개와 구원의 길”

유다의 배반이 절정으로 치달은 순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다. 이는 역설적인 아이러니다. 인간은 최악의 배반을 저지르고, 그 죄악이 극도로 드러난 상황이지만, 바로 그때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여시는 역사를 이루신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러나 그 ‘가장 위대한 구원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졌음에도, 유다는 결국 그 열매에 동참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유다는 배반 이후에 참된 회개로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아무리 위대한 구원이 우리 앞에 있어도, 개인이 회개하여 그 길로 들어서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된다”고 일깨운다.

반면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엄청난 죄를 범했음에도, 울며 통곡하며 죄를 고백했고,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다시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교회의 기둥으로 거듭났다. 이는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복음의 진리를 강력히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회개를 “죄의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진심으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즉, “나 같은 죄인도 주님께서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다시는 그 죄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이 회개 안에 포함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함으로써 절망에 빠졌지만, 그 절망을 주님께 토해내고, 사랑 안으로 되돌아왔기에 회복의 은혜를 입었다. 반면 유다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음에도 “돌아갈 길이 없다”는 잘못된 확신에 빠져버렸고, 사탄의 음성에 휘둘려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장재형목사는 이 차이를 두고 “후회와 회개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반복해서 강조한다. 후회는 단지 ‘내가 이런 잘못을 했다, 아차 싶다’라는 감정적 반응에 머무를 수 있지만, 회개는 실제로 그 죄에서 떠나 주님께 복종하는 행동 변화를 동반한다. 그래서 회개는 눈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결단이다. 베드로는 회개 이후,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살아갔다. 만약 그가 단순한 후회에만 머물렀다면, “나는 이제 주님을 부인했으니 제자로서 자격이 없다”며 자괴감에 빠져 더 깊은 어둠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만난 후, 진정한 용서를 체험했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 선포의 선봉장에 섰다. 즉, 회개는 구체적인 헌신과 순종의 삶으로 이어져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

교회에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회개 없이 구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율법주의적이거나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 원리를 요약한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값을 치러 주셨으니,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범했어도 용서를 받을 길이 열려 있다. 그러나 그 길로 실제로 들어서려면, 회개로써 예수님께 나아와야 한다. 만약 내가 “그 사랑이 있는 건 알지만, 난 굳이 돌이키고 싶지 않다”라고 마음을 닫으면, 아무리 큰 사랑과 구원이 주어져도 내 것이 될 수 없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두고 “복음은 전 인류를 위한 길이지만, 개인이 자유 의지로 그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내 몫의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파한다.

사순절은 바로 이런 회개의 과정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특별한 절기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성, 그리고 유다처럼 배반할 가능성을 인식하게 된다. 교회생활을 오래 했어도, 직분이 높아도, 내가 진정 주님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배반의 씨앗이 자라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은혜를 바라보면, 회개의 소망이 생겨난다. “내가 지금이라도 돌이키면, 주님께서는 나를 받아주시고 다시 세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 잡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사순절을 맞아 “회개와 구원의 길”을 특별히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회개하려고 할 때, 사탄은 “이미 늦었다”거나 “너 같은 죄인이 어떻게 돌아가겠느냐”는 식의 절망감을 심어 준다. “그냥 후회만 하다 끝나는 게 차라리 편하지 않겠느냐”는 교묘한 속삭임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와 연약함을 덮기에 충분하다. 한편, “회개해도 또 죄 지을 텐데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도 들 수 있다. 하지만 회개는 단 한 번으로 완결되지 않고, 날마다 반복되는 신앙의 여정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의 죄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 매일의 삶에서 회개하고, 또 주님께로 돌아서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베드로도 한 번 회개로 모든 것이 완벽해진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실수가 있었고 성장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매번 주님 앞에 엎드려 돌이키고,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를 경험했다.

유다의 예가 비극으로 남은 이유는, 그가 마지막까지 자기를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탄이 틈타서 그의 마음을 절망과 자책으로 몰아넣었고, 실제로 회개하면 용서가 가능했음에도, 자신에게는 길이 없다고 단정 지어버렸다. 이는 사탄이 원하는 방식 그대로, 자멸의 길을 택한 것이다. 교회에서도 누군가가 큰 죄나 실수를 범했을 때, “이제 더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며 떠나버리거나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복음은 어떤 죄에도 돌이킬 길이 있다고 말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은, 회개를 통해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확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죄인을 정죄하고 내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회개를 돕고, 돌이킬 기회를 제공하며, 용서의 은혜를 베푸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회개와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먼저, 자기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단지 “내가 잘못했네”라는 후회 수준을 넘어, “주님, 제가 주님의 뜻을 거스르고 죄를 범했습니다. 이제는 그 죄에서 떠나겠습니다”라는 결단을 세워야 한다.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이 이미 나를 위해 피 흘리셨음을 믿어야 한다.나의 죄책감을 영원히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십자가에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셋째, 죄를 벗어난 후에는 다시 같은 죄로 돌아가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 공동체의 도움을 통해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회개는 마음의 작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회개한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고자 더욱 노력하게 된다”고 하며, “베드로가 회개 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 생명까지 내걸었던 것처럼, 진정으로 회개한 이에게는 헌신과 순종의 열매가 나타난다”고 언급한다.

사순절은 바로 이 길을 다시 확인하는 시기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음을 기억한다. 유다는 그 문턱에서 스스로 돌아서 버렸지만, 베드로는 그 문턱을 넘어 은혜를 붙들었다. 오늘날 우리 각자도 이 두 사람의 길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기로에 선다. 이미 교회를 다니고, 많은 봉사를 하고, 직분을 맡고 있다 해도, 내 안에 유다처럼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는 분’, 혹은 ‘내게 실리를 주지 못하는 분’으로 치부하는 마음이 자라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만약 그런 마음이 있다면, 지금이 “회개와 구원의 길”로 나아갈 절호의 기회다. 장재형목사는 “사순절에 많은 이들이 기도와 금식을 하며,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한다고 하지만, 정작 내 안의 죄와 탐심을 비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종교행위에 그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반대로, 사순절에 진실하게 자기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묵상한다면,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주님의 용서가 얼마나 크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신실한지를 깨닫는 순간, 비로소 유다의 길이 아닌 베드로의 길을 갈 수 있다. “돌이키라, 내가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예수님의 음성은, 교회를 통해, 말씀을 통해,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오늘도 계속해서 들려온다. 문제는 우리가 그 음성을 외면하고 밤으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그 음성을 듣고 눈물로 회개하며 새벽을 맞이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이처럼 유다의 배반 이야기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교훈은, 인간은 언제든지 사랑 앞에서 등을 돌릴 수 있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회개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을 강조하면서, 궁극적으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매일 주님 앞에 나의 죄를 내어놓고, 그분의 은혜를 사모하며, 행동으로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교회가 추구하는 복음 사역은 사람들이 회개와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성도가 서로에게 권면하고, 때로는 아프더라도 죄를 지적해 주며, 회복을 위한 기도를 함께 드려야 한다. 이 공동체적 사랑이 살아 있을 때, 혹 누군가 잠시 넘어지거나 의심에 사로잡혔다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결국, 요한복음 13장에 담긴 이 배반의 드라마는 우리 모두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가. 예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때로는 부담스럽고, 세상적 기대와는 달라 보이더라도 나는 주님의 길을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유다처럼 “이 길은 내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리고 등을 돌리겠는가. 그리고 그 길에서 혹여나 타락했다 해도, 베드로처럼 다시 돌아와 회개하겠는가, 아니면 후회와 절망에 빠져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가겠는가. 장재형목사는 이 질문을 사순절에 특별히 되새기며, “십자가를 붙들고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과 고민, 죄의 유형은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재정에 대한 욕심 때문에, 누군가는 명예나 권위에 대한 갈망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배반의 문턱에 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결론은 같다. “주님 앞에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다시는 그 길을 가지 않겠다”는 회개가 없이는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미 열어 놓으셨으나, 그것을 실질적으로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응답에 달려 있다”는 장재형목사의 말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유다의 배반을 통해 영적 경각심을 갖게 되고, 베드로의 회복을 통해 소망을 발견한다. 교회는 늘 이 두 길 사이에 선 성도들을 품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돌이킬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리고 사순절은 이 작업을 가장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시기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기초이기에, 그 사건을 깊이 묵상할 때 내 죄의 실체와 주님의 사랑의 크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사랑을 붙들고 회개의 무릎을 꿇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의 길에 동참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유다가 마지막 순간에라도 주님께 돌아왔다면, 베드로와 같은 은혜를 누렸을 것”이라는 가정까지 언급하며, 하나님 사랑의 끝없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유다는 결국 그 문을 스스로 닫았으니, 우리가 그 어리석음을 되풀이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배반의 서사는 “사랑을 외면한 자리”가 얼마나 가까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마지막 권면”조차 외면할 수 있는 인간의 완고함을 경고하며, 동시에 “회개와 구원의 길”이 언제나 열려 있음을 역설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세 가지가 요한복음 13장 20-30절에서 빛처럼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예수님께서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말씀하신 직후, 배반의 예고가 나오고, 실제로 유다가 밤으로 나간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완성되자,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새 생명이 주어진다. 교회가 이 복음의 진리를 붙들고 살아갈 때, 우리는 유다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베드로의 회복에서 소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소망은 “회개와 순종”이라는 실제적 결단으로 열매 맺는다. 이것이 바로 사순절을 맞이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던져지는 도전이며, 동시에 약속이다. 장재형목사가 늘 강조하듯, “우리는 언제든지 베드로가 될 수도, 유다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어떤 길을 걸을지는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이 메시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갈림길에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회개함으로써 구원의 기쁨을 누리겠다”고 결단할 때, 비로소 배반의 밤이 아닌 부활의 아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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