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18장 12-22절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결박당하여 대제사장 안나스에게로 먼저 끌려가시는 장면을 매우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장면은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사건을 결정적으로 준비하는 핵심적인 순간이다. 특히 요한복음 기자는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서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다루어진 안나스의 존재를 분명하게 부각함으로써, 종교 권력의 부패와 음모가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향해 작동했는지 고발한다. 여기에는 대제사장직의 세습과 타락한 종교 권력의 실체가 분명히 드러나며, 예수님께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의 거짓과 폭력에 의해 어떠한 모함을 받고 희생당하시는지 증명된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그 시대의 역사를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될 수 있는 종교적·사회적 권력의 부패를 돌아보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특히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 안에 담긴 부당함과 역설을 상세히 짚어낸다. 본문을 중심으로 한 깊은 묵상을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증언하시고, 끝내 구속의 길을 여셨음을 우리가 재인식하기 원한다.
성경 본문에 의하면(요 18:12-14),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는 군대와 천부장, 그리고 유대인의 하속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한 직후, 곧바로 예수님을 결박하고 먼저 안나스에게 데려간다. 안나스는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으로서, 이미 상당한 영향력과 재산, 그리고 막강한 배후 권력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요한복음 18장13절은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라고 간단히 기술하지만, 이 말 속에는 당시 유대 종교체계가 안나스 가문 중심으로 얼마나 부패하고 깊게 얽혀 있었는지가 함축되어 있다. 사실 대제사장의 직분은 레위기의 규정에 따라 종신직이어야 했고, 무엇보다 거룩하고 순결하게 유지되어야 할 자리였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안나스는 A.D. 6년부터15년까지 무려 9년 동안 공식적으로 대제사장직을 지냈고, 그 이후에는 그의 다섯 아들들이 차례로 대제사장직을 세습받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위인 가야바를 대제사장으로 앉혔다. 이는 정상적인 절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극도로 타락한 종교 권력의 세습 체계였다.
이 부패한 구조를 배경으로, 요한복음 기자는 주님께서 체포된 직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려갔다고 분명히 기록한다(요18:13). 법적으로만 본다면,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 앞에서도 재판이 이뤄져야 했고, 또한 정식 종교재판은 날이 밝아야 하고, 반드시 성전 마당, 즉 산헤드린이 모이는 장소에서 시행되어야 했다.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의 재판 절차는 매우 엄격하여, 최소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했으며, 거짓 증언이 드러나면 그 증언은 무효가 되었다. 게다가 사형 판결의 경우, 그 즉시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은 유대 당국이 아니라 로마에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로마 총독의 공적 재판이 추가로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율법을 지독히 준수한다 자처하던 자들이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밤중에 예수님을 은밀히 잡아들여 안나스에게로 먼저 데려갔다. 이는 명백한 율법 위반이었으며, 불법적인 재판 진행이었다.
왜 굳이 안나스였을까? 단지 가야바의 장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찾은 것일까? 아니면 안나스가 모든 권력과 음모의 배후에서 실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실세’였기 때문일까? 많은 학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장재형목사 같은 이들도 안나스의 존재를 단지 “전직 대제사장”으로만 이해하기보다, 실제로 예수님의 체포 및 처형 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핵심 인물로 본다. 안나스는 이미 로마와 결탁하여 대제사장직을 사고팔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성전에서 파는 제물을 통해 얻는 이득(‘성전 장사’)을 사실상 독점했다. 그 결과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자 장사치들의 탐욕을 실현하는 장소가 되었고(요2:13-16; 마 21:13),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초반과 말기에 두 차례나 성전을 정화하심으로써 이 부패한 구조를 정면으로 비판하셨다.
당시 성전에서 제물을 구매할 때, 원칙적으로는 흠 없는 희생제물을 골라야 했다. 그러나 ‘성전 안’에서 파는 제물은 대제사장 측 검열관들이 자동으로 통과시켜 주었고, ‘성전 밖’에서 가져온 제물은 혹여 흠이 전혀 없다 할지라도 의도적으로 흠이 있는 것으로 판정받기 일쑤였다. 결국 모든 순례자와 예배자는 비싸고 부당한 가격을 주고서라도, 성전 안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제물을 살 수밖에 없었다. 비둘기와 같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제물조차도, 성전 안에서는 몇 배 이상의 고가로 판매되었다. 이런 식으로 축적된 막대한 재물은, 안나스 가문과 결탁한 사두개파 지도층에게 돌아갔다. 더욱이 이들은 로마의 권력자들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에, 자신의 종교적 특권과 배후 정치력을 이용해 안정적으로 기득권을 유지했다.
이렇듯 종교 권력의 부패를 상징하는 안나스가 “먼저” 예수님을 심문했다는 것은, 단순한 절차상의 해프닝이 아니라 본격적인‘예수 죽이기’ 음모가 시작되는 결정적 단서였다. 요한복음 18장 19절 이하에서 안나스는 예수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묻는다. 이 질문은 매우 전략적이었다.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느냐, 혹은 예수님이 유대교의 전통과는 전혀 다른 혁명적 교훈을 은밀히 퍼뜨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식의 추궁이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은밀하게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답변(요 18:20)을 전한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공장소인 회당과 성전에서 늘 말씀을 가르치셨고, 군중 앞에서도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심지어 성전 정화 사건도 공개적으로 행하셨으니, ‘비밀 결사’와 같은 이미지를 덧씌우려던 안나스의 의도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가 드러난다.
예수님은 자신을 직접 심문하는 안나스의 질문에 대하여,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요 18:21)라고 답하신다. 이는 유대 재판 관습에도 부합하는 매우 합법적이고 정당한 대답이다. 왜냐하면 누구를 정식으로 고소하려면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한데, 만약 예수님이 정말로 위험하고 사악한 교훈을 펼쳤다면, 그 ‘피해자’나 ‘목격자’가 당연히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안나스는 예수님께 스스로 자기 죄를 자백하게 만들려는, 일종의 자백 강요 심문을 시도한다. 이 대목에서 불의한 재판의 실체가 한층 분명해진다. 예수님이 합리적이고 정당한 변론을 말씀하셨음에도, 곁에 있던 한 하속이 예수님의 뺨을 치며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렇게 대답하느냐?”(요 18:22)라고 모욕한다. 재판이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불의의 자리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 부분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부당한 폭력 앞에서도 묵묵히 그 길을 가고 계심을 본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 취급을 받으며 결박되어, 밤중에 열리는 불법적인 심문 앞에 서 계신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진리의 말씀을 지키신다. 재판 절차와 율법의 본래 정신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안나스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자로 몰아붙이지만, 사실 정작 신성모독을 범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자는 안나스 자신이었다. 타락한 종교 권력은 스스로를 수호하기 위해 얼마든지 거짓과 폭력을 동원한다. 그 결과 성전은 장사치들이 가득한 곳으로 바뀌고, 대제사장의 자리는 돈과 결탁된 세습직으로 전락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본문 묵상에서, 예수님의 수난이 단지 개인적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거대한 종교적·정치적 부패 구조와 부딪혔던 사건임을 강조한다. 그 시대의 대제사장직이 어떻게 친로마 성향의 자들이 매수와 뒷거래를 통해 독점했는지, 다시 말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가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변질되었는지 되짚는 것이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우리 시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오늘날 교회나 어떤 신앙 공동체도,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언제든지 ‘안나스화’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부와 권력을 탐닉하는 왜곡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던 예수님의 분노와 말씀을 기억한다면, 교회가 세상에서 어떠한 자세로 존재해야 하는지가 더욱 분명해진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한 사람”의 이야기다(요 18:15-18). 요한복음은 제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린 상황에서도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가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들어갔다고 전한다. 그때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었던 이 다른 제자가 베드로를 데려와 문을 통과하게 해 준다. 본문의 맥락이나, 교회사적·전통적 해석에서 보통 이 인물을 사도 요한이라 추정하는 해석이 많지만, 일각에서는 유다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만약 그가 유다였다면, 이미 대제사장 측과 내통하고 있었기에 베드로를 들어오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요한이 대제사장 가문과 일정한 친분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베드로가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실수와 실패를 많이 했지만,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고, 배신할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칼을 빼들 만큼 열정적이었다(요 18:10).
그러나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불을 쬐던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만다(요 18:17-18; 25-27). 이는 예수님께서 이미 예언하신(요 13:38) 대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어쩌면 이 순간에 베드로가 해야 했던 일은, 그 불법 재판 현장에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안나스 측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제자 공동체를 반체제 음모 집단으로 몰아가려 했다. 만약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이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고, 결코 유대 율법을 파괴하려 하신 적이 없다.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오히려 참된 예배의 회복을 말씀하셨다”라고 증언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 자리는 목숨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베드로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튼 이 장면은 베드로의 부인을 통해 인간 연약함의 극단을 보여주고, 동시에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얼마나 큰지 대비시킨다.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찾아오시고(요 21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심으로 그를 회복시키신다.
예수님의 심문 장면은 이후 빌라도에게 넘어가는 재판 절차(요 18:28 이하)와 이어지며, 십자가형이 결정되어 간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단순히 ‘힘에서 밀려 잡혀간 비극적 희생자’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증언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임을 보여주고자 한다(요 18:37). 즉, 예수님께서는 능력 있으신 하나님으로서 충분히 자기를 지키실 수 있음에도, 우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고난과 멸시를 감당하셨다. 교권과 정치 권력이 결탁해 있는 이 어둠 속에서, 예수님은 묵묵히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는 길을 택하셨다. 그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해석하면서, 오늘날 교회가 처한 상황과 굉장히 유사한 점을 지적한다. 그 시대에도 사람들은 “율법을 지킨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밤에 몰래 재판을 열어 무고한 예수님을 잡아들이는 불의한 일이 벌어졌다. 스스로를 거룩한 집단이라 내세우면서도, 정작 그들은 무력과 음모, 그리고 부당한 결박으로 예수님을 누르고자 했다. 결코 낮에 당당히 재판을 열지 않고, 대제사장의 집 안에서 은밀히 악행을 벌이는 모습이 바로 위선과 독선의 전형이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불의한 권력이 기독교 신앙과 결탁하여 수많은 폭력을 휘두른 사례가 존재한다. 중세 시기의 종교재판이나, 교권이 왕권과 결탁하여 권세를 누리던 여러 역사적 상황 속에는, 당시 유대 교권자들과 다를 바 없는 타락과 오류가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부패를 막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참된 예배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까? 장재형목사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강조한다. 첫째, 교회는 언제나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공동체로 서야 한다. 율법이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혹은 ‘교회의 전통’이라는 명목을 내걸어도, 그 본질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이 없으면 불의와 부패로 빠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늘 진리를 밝히 말씀하셨고,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요 2:16). 교회 역시 물질적 이익과 세속적 권위를 추구하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와 기도, 그리고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여야 한다.
둘째, 성전이나 교회가 어떤 거대한 건물이나 제도 그 자체로서의 권위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요 2:19)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의 육체가 곧 참된 성전이라는 선언이다(요 2:21). 건물이나 조직이 부패했다면, 그것을 헐고 진정한 예배와 말씀 중심의 공동체로 재건해야 한다는 영적 원리가 담겨 있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성전을 악용했던 안나스와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언제든지 자신의 부패를 성찰하고, 참된 예배의 길을 회복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교회라는 틀에 갇혀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며, 예수님의 진리와는 동떨어진 행태를 보인다면, 그것은 곧 안나스의 길을 따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셋째, 제자들의 연약함과 그 회복 과정을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음에도, 가장 비참하게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그를 찾아오셨고, 그를 사도로 회복시키셨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자신이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이유로 혹은 지도자라는 이유로 우쭐대거나, 반대로 죄책감과 실패감에 빠져 포기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회복을 주신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돌아오는 일이다. 베드로처럼 눈물로 회개하고, 다시금 주님께 마음을 열 때, 우리의 실패와 수치는 하나님 은혜의 도구로 바뀐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십자가의 길에서 인간의 연약함이 낱낱이 드러나지만, 주님의 보혈로 인해 완전히 새롭게 세워지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라고 해석한다.
넷째, 교권적 폭력은 언제나 은밀하게 자행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을 심문한 안나스의 태도는 합법적 절차를 표면적으로만 지키려 했고, 실제로는 협잡된 증언과 폭력으로 예수님을 옭아매려 했다. 이런 식의 불의는 종종 “공공의 선”이나“종교의 순결” 같은 미명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고대 이스라엘의 산헤드린 재판, 중세 시대의 종교재판, 근현대 역사에서 벌어진 정치권력-교권의 야합 등 모두가 이를 증언한다. 우리가 교회 안팎에서 힘을 가진 자들, 지도자들의 결정 과정과 그 진행 방식에 대해 늘 깨어 감시해야 하는 이유다. 왜냐하면 힘이 있는 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음모를 꾸미거나,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이는 명분을 동원해 폭력성을 감추는 일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예수님께서는 이런 부당한 폭력 앞에서도 거짓으로 맞서거나 폭력으로 보복하지 않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빼든 베드로를 향해서도 “칼을 집에 꽂으라”고 명하셨다(요 18:11). 그리고 안나스의 하속에게 뺨을 맞으시는 장면에서조차, 주님께서는 불의에 침묵하지는 않으셨지만(요 18:23), 폭력으로 대응하시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내가 악을 말하였으면 그 악한 것을 증언하라”(요 18:23)고 하심으로써, 진리의 빛으로 어둠을 드러내는 길을 취하셨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포하심으로써 악의 최후를 결정지으셨다. 이처럼 예수님의 대응 방식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진리와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주목하여, “예수님은 세상의 논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승리하셨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길이요,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거룩한 순종의 길이다”라고 강조한다.
결국 요한복음 18장 12-22절, 특히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라는 구절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고난이 단지 유대교 지도자들의 오해나 시기심의 결과가 아니라, 그들의 뿌리 깊은 부패한 종교 권력 구조 안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난 일임을 상기시킨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 한가운데 들어가셔서, 무죄하심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과 모욕을 당하시며 십자가를 지기 시작하셨음을 보여 준다. 안나스의 집 뜰에서 예수님이 취하신 태도, 불법 재판과 폭력에 맞서는 방식, 제자들의 실패와 연약함, 그리고 결국은 구원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발걸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매우 크다.
이 본문을 통해 장재형목사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 어떠한 자세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더 깊이 살펴보자고 제안한다. 한편으로는 세상의 논리와 손잡은 타락한 종교 권력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숨어 있지 않은지 날마다 점검해야 한다. 물질적 이익과 명예, 권력에 대한 욕망이 성전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진리와 사랑의 힘을 배워야 한다. 부당한 공격이나 모함 앞에서, 거짓을 폭로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자기 삶을 내어주는 희생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길을 우리도 따라야 한다.
특별히 “내가 은밀하게 말한 것이 없다”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교회의 사역과 삶의 형태가 늘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쳐 준다. 예수님의 복음은 빛이기에, 어둠 속에서 몰래 퍼뜨리는 위험한 사상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는 복음을 드러내 놓고 선포해야 한다. 설교든, 봉사든, 선교든, 그 모든 행위에 있어서 불순한 동기나 음모가 없어야 한다. 교회 내 의사결정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공정한 절차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안나스가 은밀하게 모의하고, 밤에 재판을 열고, 증인의 증언도 없이 예수님을 몰아세우는 일은 결코 교회 안에서 재현되어서는 안 될 어둠의 방식이다.
나아가,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절망의 늪에도 빠져들지 말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을 제시한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나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마 26:35)라고 맹세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막상 위협이 닥치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했고, 심지어 저주까지 섞어 부정했다(막 14:71). 이는 매우 참담한 패배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훗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셨을 때(마 28:10; 요 21장), 베드로를 향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심으로써 베드로를 회복시키셨다. 이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가 어떻게 사도로 거듭날 수 있는지가 나타난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을 두고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부활했고, 그의 회복이야말로 모든 실패한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약속”이라며, 하나님의 자비가 가장 깊은 수치의 자리에 임한다는 복음의 신비를 강조한다.
또한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네가 무슨 권위로 이 일들을 하느냐?”라고 항변했던 모습을 연결해서 볼 수 있다(요 2:18).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하셨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것이 예수님의 몸, 곧 부활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해석한다(요 2:21). 그런데 이 ‘성전 청결 사건’은 곧바로 종교 권력층의 분노를 샀고,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결국 안나스가 주도한 음모의 본질은, 예수님께서“낡은 성전을 헐라”고 하심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데에 있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복음은 낡은 제도와 죄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창조와 구원의 길을 여는 것이다. 그 길은 종종 기득권자들에게는 불편하며, 심지어 위협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으셨고, 끝내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구원의 성전을 세우셨다. 교회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언제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순전한 신앙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 더 깊이 깨달아야 할 교훈 가운데 하나는, 인간 역사 속에서 가장 추악하고 부당한 음모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수많은 모략과 거짓 증언을 동원해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넣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오히려 이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었다. 바로 죄인인 우리가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사건이 그곳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사실은 오늘날 교회가 고난을 받거나 세상의 미움과 음모에 부딪힐 때에도, 결코 주저앉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었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승리가 온 우주에 선포되었다. 비록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려가는 상황이 펼쳐진다 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다.
이처럼 요한복음 18장 12-22절은 예수님의 체포와 불법 심문 장면을 통해, 부패한 종교 권력과 진리이신 예수님의 충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부패와 거짓의 죄악을 멀리하고, 예수님의 길을 담대히 따르라’고 촉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현실 교회에 적용하는 설교와 가르침에서, 특별히 “성전 안의 장사치”가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고 여러 번 역설해 왔다. 교회가 세상의 물질적 야망이나 권력 다툼에 휘말리면, 안나스의 집 뜰에 끌려가 뺨을 맞으시는 예수님을 또다시 모욕하는 꼴이 되고 만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거나, 은밀한 이익을 챙기면서도 겉으론 거룩함을 표방하는 이중적 태도를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 동시에, 이미 실패한 제자라 할지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면, 베드로처럼 사도로 회복될 수 있다는 소망을 품어야 한다.
결국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라는 본문이 시사하는 핵심은, 십자가의 길이란 부패한 세계의 불의와 폭력 앞에서도 꺾이지 않으며, 진리와 희생으로 온전히 순종하는 길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그 길을 홀로 걸으셨고, 우리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초청하신다. 현실적으로 교회가 세상 권력과 맞서면서 불이익을 감수하는 일이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이미 걸어가신 길, 한없이 모순되고 어두운 곳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뤄가시는 그 길을 붙들 때, 우리는 비로소 참 자유와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이 메시지는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유효하다. 종교적 명분으로 포장된 불의가 난무할 때, 우리는 “정말 이게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습인가?”를 깊이 물어야 한다. 교회가 세속 권력과 야합해 부와 권세를 누리다가, 어느새 예수님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본다 해도, 거기에 절망하거나 체념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안나스의 집 뜰에서, 그리고 빌라도의 관정에서, 참혹한 십자가 위에서 승리를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켜야 하며, 진리를 증언해야 한다. 비록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처럼 빛 가운데서 모든 것을 드러내고, 은밀한 악에 맞서며, 용서와 희생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이 모든 흐름 속에서 장재형목사는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다시금 요한복음 18장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고 권면한다. 우리가 체포당하신 예수님 옆에서, 혹은 베드로의 입장에서, 또는 타락한 대제사장 체제의 모습을 보고 있는 방관자의 입장에서,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할지 질문하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거짓 증언을 하는 자들의 편에 선다면, 그것은 교회가 본질적으로 있을 자리가 아니다. 반면, 우리의 인간적 두려움과 연약함으로 때로는 실패할 수 있으나, 베드로처럼 주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 주님은 우리를 새롭게 사용하신다. 그럼에도 끝까지 음모와 부정, 위선과 폭력의 편에 선다면, 우리 또한 언젠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라고 기록한 요한복음의 세세한 표현 하나에는, 복음서 기록자 요한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즉,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 전 과정에 걸쳐, 안나스가 얼마나 결정적이며 부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독자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려는 것이다. 실제 현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지만, 그 배후에서 모든 것을 주도한 인물이 안나스였기에, 예수님을 이리로 “먼저” 보내 심문하게 했다. 이처럼 성전 권력과 세습된 종교 카르텔은 법 절차를 무시하고, 스스로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종교적·사법적·정치적 ‘불법’을 낱낱이 드러내셨고, 결코 침묵으로만 일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지셔야 할 구원의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순종과 겸손, 그리고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에 또 한 번 감동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8장 강해를 할 때, 안나스가 보여 준 “교권주의의 극치”와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극치”가 극명하게 대조된다고 말한다. 교권주의자 안나스는 돈과 권력을 이용해 성전을 사유화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부와 명예를 추구했다.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자신을 낮추어 사람들 가운데 오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으며, 죄인들의 손에 잡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인류 구원을 이루셨다. 이 대조를 통하여 복음서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권력과 부를 지향하는 정신이 아니라, 낮아짐과 섬김, 그리고 희생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교회가 이 진리를 붙들지 않으면 안나스가 보여 준 부패를 되풀이할 뿐이며,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게 된다.
요한복음 18장 12-22절은 예수님의 수난의 서막이자, 한없이 부패한 종교 권력의 실상을 드러내는 무대이다. 우리는 그 현장에서 예수님께서 결박당하고 모욕받으시는 아픈 장면을 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와 진리 수호의 모습을 발견한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억울한 재판을 받고, 모든 거짓 가운데서도 진리를 지키셨다. 그리고 끝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다. 이 사건은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복음의 진리를 온몸으로 증거한다(요1:5).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면서, 모든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길에 동참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안나스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예수님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비단 2000년 전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교회 생활, 신앙생활 속에도 ‘안나스적 요소’가 도사리고 있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동시에,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자들을 다시 불러주시는 분이라는 소망을 놓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결국 이 본문은 부패한 종교 권력과 무죄한 예수님의 대조, 그리고 그 속에서도 흔들리는 제자들의 모습이 교차하며, 십자가의 구원 경륜을 준비해 가는 중요한 사건이다. 우리의 마음에 이는 수많은 질문과 결단을 촉구한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침묵하거나 오히려 거짓에 가담하여 예수님을 배신할 것인가. 이 물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
요한복음 18장 12-22절에서 드러나는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부패한 종교 권력 구조 안에서 고난받으셨으며, 안나스를 필두로 한 사두개파의 기득권 체계와 충돌하셨다. 둘째, 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하면서도 밤에 불법 재판을 열고, 폭력을 휘두르며, 두 명의 증인이 필요한 공정한 절차조차 무시했다. 셋째, 예수님은 그러한 음모 속에서도 진리를 잃지 않으셨고,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셨으며, 오직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넷째, 제자들은 도망치거나, 베드로처럼 부인하기도 했으나, 주님은 그들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셨고, 결국 회복시키셨다. 다섯째, 오늘날 교회 역시 끊임없이 이 본문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며, 안나스적 교권주의와 부패를 경계해야 한다. 여섯째, 예수님을 붙들고 진리를 증언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십자가 이후 부활이라는 영광의 길을 예비하신다.
이 진리는 시대를 초월한다. 교회가 존재하는 한,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날카롭게 다가올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체포하고 심문했던 그 밤의 부정의와 위선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재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불의의 세력을 이미 십자가와 부활로 이기셨고, 우리에게는 성령을 통해 이 진리를 알게 하시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희망이자 사명이다. 그리고 장재형목사가 끊임없이 강조해 온 대로, 교회는 예수님을 본받아 교권적 제도와 정치적 야합을 버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 땅에서도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이 확장되며, 세상은 교회를 통해 참된 성전이 무엇인지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신 예수님은, 가장 타락한 종교 권력의 중심에서 “새로운 성전”을 선포하셨고,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써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길을 여셨다. 이것이 곧 복음의 핵심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죄와 부패를 드러내고, 동시에 사랑과 구원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 18장 12-22절을 통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이 혹시 안나스의 편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또한 베드로처럼 연약함을 지니고 있음에도, 다시금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고, 복음 증인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불의한 종교 권력에 굴복하거나 결탁하지 않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와 “새로운 성전”의 비전을 따라,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고 정결하게 서야 한다.
바라건대,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라는 이 본문을 묵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얼마나 위대하고 결정적인 구원의 사건인지를 다시금 체험하길 소망한다. 불합리한 재판, 부당한 폭력, 배신과 모략이 난무해도, 진리이신 예수님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셨다. 교회 역시 이 세상의 온갖 어둠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끝까지 빛으로 승리하는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요한복음 18장 12-22절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엄중하고도 위대한 메시지이며,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해 온 핵심 교훈이다.
www.davidja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