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성령 안에 있는 자의 정죄 없음과 자유
로마서 8장은 복음의 핵심을 가장 장엄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장으로,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에게 오랫동안 깊은 영감을 주어온 말씀이다. 특별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는 시작구절은, 우리의 구원이 기초하고 있는 놀라운 진리를 선포한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 본문이 주는 은혜를 자주 강조하면서, 성화의 과정 가운데 여전히 죄와 싸우며 시행착오를 겪는 자들에게도 확신과 자유가 있음을 역설해 왔다. 여기에서 ‘그러므로’로 시작되는 8장의 도입은 결코 가볍게 지나칠 만한 표현이 아니다. 이는 바로 앞장, 즉 로마서 7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7장 끝자락에서 바울은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도 여전히 죄의 유혹과 싸우며, 죄에 쉽게 굴복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바울 본인도 율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갈등하고 신음하며,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했다(롬 7:24). 그러나 바울은 그 탄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편으로 “그러나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고 담대하게 선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나”라는 역접 표현이 더 자연스러울 듯싶지만, 바울이 선택한 단어는 “그러므로”이다. 이것은 “죄와의 싸움에서 넘어질 때마다, 너희가 이미 구원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 확고한 토대 위에서 계속 성화를 이루어 가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제(now)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선포는 단회적 사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진리를 말한다. 구원의 문턱을 처음 넘었을 때뿐만 아니라, 성화 과정 전체에 걸쳐서, 죄로 인해 때때로 넘어지는 순간마저도 변함없이 적용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붙잡혀 예수께 끌려왔을 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인을 향해 정죄의 채찍을 드는 분이 아니라, 아들을 통해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다. 물론 이것이 죄를 가볍게 취급하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싸우되, 죄에 넘어졌을 때조차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의 확신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 또한 죄와 싸움의 한가운데서 복음의 본질을 견고히 붙들라 권면해 왔으며,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은 하신다”라는 바울의 고백을 묵상하게 돕는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스도 안에(In Christ)”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죄사함과 자유, 새로운 삶의 모든 비밀이 담긴 표현이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5장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고 하셨듯, 이는 ‘사랑의 연합’을 뜻한다. 그리스도께 붙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고, 자유와 기쁨을 누린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이 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의 능력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건져냈다. 이로써 우리는 이전의 죄와 사망에 사로잡힌 신분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정죄함이 없음’이라는 이 선언은, 죄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 죄를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던 나약한 인간에게 완전히 새로운 길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했고, 오히려 죄를 더욱 부각함으로써 우리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다(롬 8:3). 그러나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고, 그리스도께서 죄를 정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는 ‘칭의(justification)’와 ‘속량(redemption)’, 그리고 ‘속죄(atonement)’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우리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던 형편이었으나, 예수님이 대속의 희생제물이 되셔서 값을 지불하시고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구해내셨다. 장재형목사 또한 여러 설교와 강의에서, 우리가 이 구원의 위대함을 충분히 인식하려면 먼저 죄의 무게와 절망을 충분히 깨닫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죄인이 죄의 심연을 자각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비로소 체험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야말로 죄인 된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건져내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다.
이처럼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이 끊어지고, 성령의 법이 우리를 새롭게 다스리게 된다. 바울은 이를 두 가지 ‘법’의 대비로 설명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게 된다(롬 8:5). 그리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롬 8:6). 바울이 말하는 ‘육신(flesh, sarx)’은 단순히 물질적인 몸이 아니라, 죄에 물든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육신대로 사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며(롬 8:7), 그러한 모습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 하지만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영에 속한 존재가 된다(롬 8:9).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은 다소 강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만큼 성령의 내주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죄로 인하여 죽었던 몸도 새롭게 살아난다(롬 8:10~11). 이것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부활’의 소망까지 내포한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듯, 우리의 죽을 몸도 부활의 권능 가운데 새 생명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희망이다. 성령은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니, 그 성령을 받은 자는 이미 부활 생명의 소망을 지닌 자로 살아간다. 바울은 이어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핏값으로 산 자들이기에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 필요가 없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라는 선언은 성화의 핵심 원리를 보여준다. 경건하고 거룩한 삶의 길은 인간적 결심이나 율법주의적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죄의 길을 과감히 끊어버리고 회개할 때, 우리는 점차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죄를 민감하게 바라보고, 그 싹을 없애라고 권면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서는 안 된다. 동시에, 우리가 ‘영으로써’ 이 싸움을 치러야 함을 깨닫게 한다. 거듭 말하지만, 이는 철저하게 ‘위로부터 오는 능력’, 즉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인간이 자기수양이나 도덕적 실천을 통해 정결해지고 해탈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죄성을 인간적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한다. 우리 안에 있는 옛 본성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알려준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라는 말씀을 통해, 성도가 세상과 죄의 세력보다 더 큰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확신하라고 권면한다. 장재형목사도 여러 차례 설교에서, 죄에 대한 두려움이나 정죄감으로 무기력해지기보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담대히 싸우라고 말해 왔다.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 있는 자의 자유’이며,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선언이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Ⅱ. 양자됨,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8장의 두 번째 큰 흐름(롬 8:14~17)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할 때, 바울은 명확하게 선언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임하면,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자녀나 육신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으로 편입된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시며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듯이, 양은 목자의 인도를 받는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았다.
이러한 진리는 구원의 핵심에서 ‘신분의 변화’를 함의한다. 구원은 단순히 죄 사함을 받는 데서 끝나지 않고, 본래 죄와 사망에 속해 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사건이다(요 1:12).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죄인들을 의롭게 하고, 나아가 ‘양자’로 삼아 주시는지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한다. 여기서 바울은 ‘양자’라는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로마 제국은 정확한 양자법을 갖고 있었고, 양자로 입양될 때 친자와 동일한 법적,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모두 부여했다. 장재형목사 역시 로마의 양자법을 배경지식으로 삼아 성경 본문을 이해하면,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확실성과 우리가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는다는 진술을 더욱 선명히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로마의 양자 결연 의식은 매우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고, 한 번 완성되면 절대 취소할 수 없었다. 세 번의 상징적 매매(mancipatio) 과정을 통해, 입양된 아들은 이전의 모든 법적 권리와 빚이 단절되고, 새 아버지의 가문에 속하여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은 “너희가 이전에는 죄의 포로요, 마귀의 노예였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고 선포한다. 그 결과, 우리가 이전에 죄의 가계에 속해서 졌던 모든 빚과 책무는 무효화되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 보호와 사랑 아래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15절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라는 표현이다. 죄 아래 있을 때, 사람들은 늘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았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율법과 심판의 그림자가 항상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는 그런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성령은 이 사실을 내적으로 증언해 주신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라고 말한다. 이 증언은 가벼운 감정의 흔들림이 아니라, 영원하고 확실한 법적 증거이기도 하다. 로마의 양자 결연에도 여러 증인이 있었듯, 우리의 영적 입양에는 ‘하나님의 영’이 직접 증인이 된다.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며, 동시에 놀라운 책임도 수반한다. 바울은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것은 곧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모든 유업을 이어받을 권한이 있음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3장 22절에서도 바울은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가문에 들어온 자들에게 주어진 하늘의 유업은 참으로 무한하고 영광스럽다.
그렇다면 이 특권을 받은 자들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로마서 8장 17절 하반부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동참하는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종교들은 대개 인간이 고통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복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 즉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따라 감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게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바 아버지”(막 14:36)라는 호칭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바로 목전에 두고 울부짖으며 탄식하셨던, 그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사용된 아람어 호칭이다. 그때 예수님은 고난 앞에서 두려워했지만, 끝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고, 그 순종을 통해 부활과 영광에 이르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됨은 세상적인 권세나 영광만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길인 고난의 길마저도 함께 감수하는 여정이다.
그 길은 결코 비참한 파멸로 이끌지 않는다. 우리의 고난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 안에서 의미가 부여되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로 안내된다. 교회 역사를 돌아볼 때, 수많은 성도들은 복음으로 인해 세상이 주는 고통을 감수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그 고난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담보로 여겼다. 장재형목사 또한 “우리가 참으로 아버지의 자녀라면, 세상의 환난과 유혹 앞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 정체성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종으로부터 아들로 입양된 자가, 이전의 노예 상태로 돌아갈 필요는 전혀 없다. 이미 법적·영적 효력이 완전하게 새로워졌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적 감수성을 갖게 되는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의 구체적인 사슬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신분이 전환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증언하신다. 이 놀라운 사실을 붙드는 것이야말로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는 원동력이다. 죄와 싸울 때마다 넘어질 수 있으나,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붙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거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더욱 사모함으로써, 우리는 죄를 점차 이기고 ‘거룩하게 변화’되어 간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십자가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누리면서 우리는 진정한 양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Ⅲ. 고난에 동참함과 영광의 소망
바울은 로마서 8장을 통해, 죄로부터 자유케 된 자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품어야 할 최종적인 목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곧 ‘영광’이다. 다시 말해, 성령 안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칭의), 지금도 구원을 이루어 가며(성화), 궁극적으로는 온전한 구원(영화)에 이르게 된다. “고난도 함께 받아야 영광도 함께 받는다”(롬 8:17)는 말씀은 이 여정이 험난하지만, 동시에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길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실제로 8장 후반부(1839절)를 보면, 바울은 우주적 회복과 부활의 희망, 그리고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을 매우 장엄하게 묘사한다. 지금 우리는 그 첫 단락인 8장 117절을 집중해서 살펴보고 있지만, 여기서 이미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고 말한 뒤, 곧바로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고난’이라는 단어는, 복음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신분이 높아지고 상속자가 되었다면, 당연히 고통에서 벗어나고 누릴 것만 누리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 자체가 십자가의 길이며, “종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하신 주님을 우리가 따를 때, 당연히 그 고난의 몫도 함께 지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다음 절에서 이어 말한다. 이 고난에는 박해나 핍박이 있을 수 있고, 때로는 개인적 고난이나 시련, 질병, 경제적 어려움, 관계의 갈등, 육신의 연약함 등 다양한 형태가 포함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된 자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누구나 삶 속에서 여러 고난을 만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절망적인 결말이나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의 과정으로 승화될 수 있다. 이 신비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의 중심 진리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수치와 고통의 자리인 동시에 가장 큰 승리이자 하나님의 지혜로 드러났듯, 그리스도인의 고난 또한 궁극적으로 보석처럼 빛나는 영광으로 드러난다.
장재형목사 역시, 크고 작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기피하거나 두려움 속에만 머물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여,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나아가자”고 늘 도전한다. 그는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신다는 사실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어떠한 시련 앞에서도 우리는 결국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열매를 볼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곤 한다. 고난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길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면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되는 길이기도 하다. 그것은 잠시의 환난을 통한 영원한 영광의 준비 과정이다(고후 4:17 참조).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취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악이 편만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할 길은 쉽지 않다. 세상은 복음의 가치를 비웃고,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성도들은 때때로 세상과 충돌하며, 심지어 교회 내부에서도 사람과의 갈등과 죄로 인한 상처를 겪는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우리의 신분을 회상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우리가 겪는 모든 시련과 결핍, 눈물과 슬픔은 성령 안에서 정화되고, 한걸음 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구원의 세 단계인 칭의, 성화, 영화의 과정에서 우리의 위치는 여전히 죄와 싸우는 중간 지점에 있기도 하다. 이미 칭의를 받았으나 완전한 영화에 이르지 못했기에, 죄의 습관이 잔존하고 육신의 유혹 앞에 약해질 때가 많다. 로마서 7장에 묘사된 내적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성령을 의지하고, 말씀의 빛으로 자신을 비추며, 회개와 결단을 반복해야 한다. 동시에 로마서 8장 1절이 선포하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확신을 붙잡아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죄책감 속에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사단의 참소에 휘둘려버린다. 바울은 결코 그것을 원치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러므로”라는 말로 8장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어떠한 구원의 기초 위에서 진행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끝내 “너희가 ‘양자’가 되었다”라고 선언하고, “성령이 친히 증언하신다”고 말한다. 그 어떤 법정적 증언보다 높은 하나님의 보증이다. 그 결과, 우리는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을 수 있으며, 종처럼 두려워 떨 필요가 없다. 더욱이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하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도 함께 지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바울이 말하는 영광은 세상의 화려함이나 일시적인 성공과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부활의 영광’, ‘하나님과의 완전한 친밀함’, ‘죄와 사망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다. 로마서 8장 후반부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라고 묻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라고 답하는 바울의 확신은, 이 영광의 실체를 아는 자의 담대함이다. 또한 이 확신이 바로 현재 우리에게 임한 성령의 ‘내적 증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기에, 어떠한 삶의 풍파와 혼돈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라는 진리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을 여러 차례 인용하면서, 성도들에게 “천국은 이미 우리의 유업이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 우리가 부름받은 존재임을 기억하라”고 강조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이 결코 무의미하거나 허무하지 않으며, 또한 고난이 단지 우리를 짓누르는 괴로움이 아니라, 거룩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연약함은 분명 현실적이지만, 그 위에 덮이는 하나님의 은혜는 더 강력하다. 바울이 말했듯이,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는 선언을 품고 살면, 우리는 죄와 유혹과 절망에 패배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승리의 찬가를 부를 수 있다.
결국 로마서 8장 1~17절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가, 성령 안에서 정죄함이 없는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른다는 복음의 정수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안에는 구원의 여러 측면이 긴밀하게 얽혀 있다. 칭의를 통해 이미 완전한 용서를 받았으나, 성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영화의 날이 되면 최종적인 완성을 맞이한다. 이 거대한 구원 계획의 한가운데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도전하며, 동시에 위로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확증하기 위해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신다”고 못박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응답은 무엇이어야 할까? 첫째, 죄를 철저히 미워하고 경계하되, 죄로 넘어질 때마다 복음이 주는 ‘정죄 없음’과 ‘새 출발의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둘째,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늘 자각하여, 두려움이 다가올 때마다 “아빠 아버지”를 부르짖는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셋째, 고난 가운데 낙심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성품과 인격이 다듬어지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더욱 형성되도록 바라보아야 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에 의해 가능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다양하고도 혹독한 시험과 유혹을 받고 있다. 때로는 신앙이 흔들리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이 구원받았는지조차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로마서 7장의 바울처럼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탄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자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통해, 죄책감과 절망 속에 있지 말고, 이미 칭의를 받았음을 상기하고, 성화의 길을 계속 걸어가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선포함으로써, 종이 아닌 자녀의 삶을 누리라고 한다.
이렇게 바울이 제시하는 복음은, 성령 안에서 죄의 사슬을 끊고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거룩하고 풍성한 삶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우리는 영광을 향해 전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고난을 만난다. 그러나 그 고난은 새로운 생명을 낳을 산고(産苦)와도 같다. 바울이 “피조물뿐 아니라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롬 8:23)고 말할 때, 그는 우주적 차원의 회복과 부활의 신비를 내다보고 있다. 이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으며, 창조 세계 전체의 탄식과 회복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영적 투쟁과도 맞닿아 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고, 그 가족의 아버지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맏아들이자, 십자가와 부활로 이 구원 역사를 완성하신 분이며, 성령은 우리 안에서 이 모든 진리를 가르치고, 증언하며, 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한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다. 아무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선포하며 살아가야 한다.
장재형목사도, 우리의 일상 안에 얼마나 많은 유혹과 혼란이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죄감과 좌절감 속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살아가는지를 안타까워하며, 이 로마서 8장의 메시지를 더욱 깊이 붙들라고 격려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광스러우면서도 결코 쉽지 않지만, 하나님의 자녀 된 자에게 예비된 충만한 승리와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라 한다. 성령 안에서 고난을 통해 더욱 강건해진 우리의 영혼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며, 영화의 날에 참된 완성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처럼 로마서 8장 1~17절에 담긴 핵심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성령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의 자유. 둘째, 양자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정체성이 법적으로나 영적으로 완전히 확증되었다는 사실. 셋째, 그럼에도 세상 속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으나, 고난을 함께 지고 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 길이라는 진리다. 이 세 가지 관점을 동일하게 가르치는 핵심 근거가 바로 ‘성령의 내주하심’이며, 그 증언을 통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 점을 확고히 붙들 때,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죄의 유혹 앞에서 나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끝으로, 로마서 8장은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정수이며, 동시에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죄, 율법, 은혜, 성령, 구원, 양자됨, 고난, 영광’ 등 신앙의 전 과정을 다시금 묵상하게 하는 귀중한 장이다. 우리 자신에게,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과연 구원을 받았는가?” “나는 여전히 죄의 흔적을 보고 절망하는데, 이 길이 맞는가?”라는 의문이 들 때마다, 이 말씀을 다시 붙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장재형목사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복음의 핵심을 떠올리며 “나는 구원받았고, 성령 안에서 결코 정죄받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고난조차도 주와 함께 갈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을 되풀이해야 한다. 그 고백 안에 죄에 대한 승리, 삶에 대한 소망, 그리고 궁극적 구원에 대한 확신이 모두 들어 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진 이 엄청난 특권과 은혜는,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로마서 8장의 가르침을 회피할 수 없다. 오히려 인생의 여러 국면에서, 특히 죄와 싸울 때 혹은 시험과 유혹 앞에서 혹은 깊은 낙심에 빠질 때, 바로 이 장에 담긴 핵심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 그 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로서의 자리를 지키며, 성령의 능력으로 회복과 부활의 소망을 힘있게 노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미 이 땅에서도, 부분적이지만 참되고 분명한 형태로 그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된 ‘복음의 기쁨’이며, “그러므로”라는 한 단어로 시작된 로마서 8장의 장엄한 메시지가 우리 모두에게 선사하는 생명의 선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