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에서 아들로 – 장재형(장다윗)목사

Ⅰ. 복음과 율법의 대비, 그리고 아들 됨의 의미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갈라디아서 3장 23절부터 4장 7절까지는 하나로 연결되는 긴 호흡의 단락이다. 사도 바울은 이 단락 속에서 “아들과 유업”이라는 핵심 주제를 다루는데, 그 모든 과정에서 “누가 하나님의 유업을 받느냐”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제기한다. 갈라디아서 3장의 결론 부분(3:29)에서 이미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밝히고, 그 흐름이 이어지면서 4장 1절 이후로 아들 됨의 정체성과 실제 상속에 관한 설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바울은 복음과 율법을 날카롭게 대조하며, 율법은 종의 역할을 했고 복음은 우리를 아들로 세운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한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는 율법으로 회귀하려는 유대주의 크리스천, 곧 거짓 교사들이 득세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복음으로말미암아 이미 구원을 받았음에도 교회를 다시 율법으로 끌고 가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 앞에서 바울은 “도대체 너희가지금 교회를 어디로 끌고 가려 하느냐?”라고 외치며, 우리가 받은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자유를 가져왔는지를 강조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여러 설교와 강의를 통해서 갈라디아서의 이러한 흐름을 조명하며, 복음과 율법의 대조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지속적으로 설명해왔다. 복음은 아들이 되게 하고, 율법은 종 노릇을 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은 복음이 가져다주는 자유와 정체성 회복의 핵심을 잘 드러낸다. 종은 구속 아래 있으며 자기 뜻대로 살 수 없지만, 아들은 자유를 누리고 상속의 권리를 가진다. 바울은 이 사실을 단순히 사변적으로 말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체험한 복음의 능력 안에서 역설한다. 율법 중심으로 돌아가는것은 ‘멍에’를 다시 메는 것과 같으며,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명백히 결론짓는다.

이러한 논리는 단순히 ‘유대교 vs. 기독교’라는 종교적 대립 구도를 넘어, 인간의 본질적 구원 문제가 무엇으로 해결되느냐 하는초점에 맞춰진다. 인간이 ‘아들’이 되느냐, 아니면 ‘종’인 상태로 머무느냐의 분기점이 바로 ‘복음’과 ‘율법’이라는 두 길에 의해갈린다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를 아들로 회복시키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종종 이 자유와 아들 됨을 붙들지 못하고, 다시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멍에 안으로 들어가곤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말미에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선언하며, 바로 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풍성함이 누구를 통해 계승되느냐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혈통이나 율법 준수 여부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역사적·영적 상속임을 뚜렷하게 천명하는 대목이다.

우리도 일상에서 이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가 많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자의식이 흔들릴 때, 마치 씨름이나 유도 경기에서 중심이 무너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함께 무너진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외치듯, 우리가 이미 아들이 된 이상 더 이상종의 멍에를 맬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는데, 다시 율법과 공로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애써 얻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바울은 이 점을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거짓 교사들에 맞서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논박한다.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이 부분을 특히 강조하며, 우리 안에 확고한 아들 됨의 정체성이 있을 때, 영적 성장과 자유, 그리고 실제적 능력이 흘러나온다고 가르친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자의식이 흔들리지 않으면, 아무리 어둠의 세력이흔들어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마치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마귀의 시험 앞에서도 담대히 이기셨듯이, 우리가 자신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주님 안에 있는 자유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 예수님은시험을 받으실 때마다, 그 밑바탕에 흐르는 확신으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러므로 나는 떡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라고 응수하셨다. 이러한 자의식과 영적 확신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갈라디아서전체 맥락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

바울은 이 복음 안에서 우리가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점을 논리적, 역사적, 신학적으로 증명해낸다. 갈라디아서 4장 1~2절에서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율법 아래 있던 유대교 역사 전체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종으로서 몽학선생과 같이 역할하는 율법을 통해서 성장하였고, 이제 때가 차매 아들로 자유롭게 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킨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은 율법의 멍에로 다시 돌아갈 것을 강요했다. 바울은 “너희가 어찌 다시 종으로 돌아가려 하느냐?”고 분개하며, 이것이 복음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종교의 습성”이 얼마나 우리의 자유를 갉아먹는지 설파한다. 율법적·종교적인 사고는 겉보기에 경건해 보이지만, 실상은 인간을 속박하고 영적 능력을 소멸시키는 경향이 크다. 그래서 종교적 행위나 의무에 매달려 힘들어하다가‘아들로서의 자유’를 놓치면, 결국 교회 내에서 분열과 정죄가 일어나게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러한 상황을 “어찌하여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 하느냐?”라고 질책하며, 복음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주지시킨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절정을 이루는 이 선언—“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은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넘어서 모든 시대 교회에 주는 강력한 권면이자 경고다.

우리가 종이 아니라 아들임을 완전히 붙들 때, 우리는 스스로를 ‘죄의 종’으로 규정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의롭다 여김받은 자’로 확립해 간다. 교회가 다른 멍에와 규칙에 집착하는 순간, 아들의 자유와 능력이 가려져버린다. 갈라디아 교인들이율법적 부담을 지고 날과 달, 절기와 해를 지키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은 결국 초등학문에 매여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삶의 형태로 되돌아간 것과 같다. 반면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신 것”(갈 4:4-5)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저주가 되어주신”(갈 3:13)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 더 이상 죄의 종으로 머무르지 않고 아들로서 담대히 살아갈 수 있음을 선포한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복음의 본질은 ‘종을 아들로 바꾸는 능력’에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책감과 두려움을 무너뜨리고, 아들과 딸로서의 자유함을 회복시키는 것이 복음의 힘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Incarnation)은, 우리에게 그분이 얼마나 사랑으로 구원하기 원하시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수 있는 분이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 죽음에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어리석음”(고전 1:25)이다. 하지만 이 어리석은 방식이야말로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구속의 길이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로마서 5장의 대표이론)로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 주셨다.

이렇게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건으로 완성된 구원은, 아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특권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그것이 곧 유업 상속이며, 아들의 영(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내주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갈 4:6). 과거에는 종의 신분이라 감히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을 수 없었는데,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히 10:19). 이처럼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인간의 역사와 신학, 그리고 실제 삶을 가로지르는 가장 근본적인 은혜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복음이 우리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심어줄 때, 우리는 더 이상 초등학문과 율법의 멍에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Ⅱ. 갈라디아서 4장 속 아들과 유업의 핵심 메시지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 4장 1~7절에서 중점적으로 풀어가는 논리 구조를 살펴보자.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다”(갈 4:1-2)는 것은, 앞서 3장 23절 이하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율법의 시기를 ‘잠정적 보호자 혹은 후견인’의 시대에 빗댄 것이다. 율법은 불완전하지만,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필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때가 차매’(갈 4:4), 곧 하나님의 예비하신 때가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율법 아래에서 속량하셨다. 이 속량(贖良)은 “대신 값을 치름”을 의미하며,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해 모든 죄값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루어졌다.

장재형목사는 이 ‘때가 찼다’는 바울의 표현을 주목하며, 구원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임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여자에게서 낳게 하신 것(갈 4:4)은 이사야 7장 14절의 예언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가 성취된 것이고, 구약의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완결을 맞이한다. 그 목적은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5). 즉, 인간이 자신을 아무리 율법으로 세우려 해도 연약함 때문에 온전히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예수님께서 법을 완성하시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단순히 죄 사함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됨이라는 신분 변화가 선물로 주어졌다고 말한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는 말씀은, 성령(그리스도의 영)이 임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음을 증언해주는 장면이다. 종은 주인을 두려워하고 멀리떨어진 존재로 바라보지만, 아들은 ‘아빠’라고 다정히 부를 수 있다. 이것이 아들과 종이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이다. 종은 시종일관 ‘법을 지켜야 함’이라는 긴장과 두려움 속에 있지만, 아들은 사랑의 유대관계 속에서 부모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지닌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만 얻을 수 있는 ‘종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전가된‘하나님의 의’를 붙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라”는 말씀과 직결된다. 지금 4장에서도 동일하게, 종 노릇하던 사람들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신 것은 우리 힘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재확인시킨다. 그리고 그 아들 됨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곧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보내시어 우리 안에 함께하심으로 가능한 실제적 교제 관계—를 부연 설명한다. 종교적 지위상승이나 단순한 호칭상의 변화가 아니라, 관계 자체가 회복된 것이다.

한편 갈라디아서 4장 7절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는 선언은 구원의 완결점을 보여준다. 아들인 이상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영적·역사적 축복을 상속받을 수 있다. 이것이복음이 주장하는 엄청난 급진성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율법 아래에서 같은 조건이 될 수 없었던 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갈 3:28). 그 아들ship의 권세는,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등함과 평등함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이는 전통적 사회질서가 인정하던 종과 주인의 구분, 남녀의 구분,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 등을 무너뜨리며, 교회를 새로운 공동체로 재탄생시키는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 내에서 율법주의자들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옛 방식으로 돌아가도록 교인들을 꾀었다(갈 4:10). 바울은 그것을 두고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종노릇하려 하느냐”고 질책한다. 초등학문은 인간이 스스로의 공로나 노력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종교적·철학적 시도 전부를 지칭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에게 복음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이미 다 이루어진 구원이며, 거기에 어떤 인간적 조건을 추가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은혜의 세계다. 율법적 요구나 의무를 자꾸 더하면 더할수록, 오히려 복음의 은혜는 무력화되고, 아들이 누려야 할 자유가 훼손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이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가 보여주는 복음의 핵심 정신을 “우리에게 주어진 아들의 정체성을 끝까지 붙들라”는 한마디로 요약한다. 아무리 교회가 조직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성숙해진다 해도, 만약 교인들의 마음속에 “아들로서의 정체성”이희미해지면, 결국 율법적 습관이나 세상적 가치관이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4장 후반부(갈 4:19-20)에서 바울은 그 사실을 절절히 토로한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바울은 교회 안에서 복음이 온전히 구현되고 아들 된 자유가 회복되기까지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수고하겠다고 강조한다.

갈라디아서 4장 중간 부분에서 등장하는 바울의 개인적 고백(갈 4:13-15)은, 바울이 얼마나 육체적으로 연약했는지, 그럼에도갈라디아인들이 그를 사랑으로 받아준 은혜로운 시절이 있었음을 회상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혹은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고, 심지어 눈이라도 빼줄 듯이 바울을 향해 헌신적 사랑을 보였다. 이는 복음 안에서 그들이얼마나 자유롭고 뜨거운 사랑으로 충만했는지를 말해주는 역사적 장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서로 이간질하고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에게 현혹되어 분열하고 미워하는가? 바울은 이 점이 너무나 안타까웠고, 그래서 거친 어조로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결국 갈라디아서 4장의 메시지는, 단지 “율법은 필요 없으니 완전히 버려라”는 피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율법이 지닌본래 목적—우리를 죄로부터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보호자적 역할—을 성취하게 만든 뒤에는, 더 이상 그것에묶일 필요가 없다는 매우 큰 자유 선언이다. 인간은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 단계에 이르나, 그 죄를 해결하고 아들이 되는 것은 율법을 더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량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들이 된 이후에는, 본질적으로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자유롭게 누리는 자가 되며, 서로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통해 율법의 완성이 무엇인지를 체험해가야 한다. 율법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사랑으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야말로 아들다운 삶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점을 자주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율법을 충족하는 종교인”이 아닌 “복음으로 자유케 된 아들”임을 잊지 말 것을 거듭 당부한다. 아들로서의 자유를 맛본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내가 아들을알고 아들이 나를 아신다”는 친밀함으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교회는 생명력 있는 공동체가 되고, 세상에 대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의 역동성이다.

Ⅲ. 종에서 아들로 전환되는 자유와 정체성, 그리고 삶의 적용

바울의 개인적 체험과 갈라디아 교회 상황이 복합되어 나타나는 갈라디아서 4장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자유’와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율법과 복음, 종과 아들, 속박과 자유, 또 이를 방해하는 거짓 교사들의 문제 등이 생생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특히 “너희가 아들이면 유업을 받을 자”라는 그 놀라운 선언은 인간의 운명을 송두리째바꾸는 위대한 메시지다. 한갓 죄의 종에 불과하던 인간이 어찌 전능하신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기적이며, 복음이 주는 충격적인 은혜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눈여겨볼 점은, 바울이 “어떻게 아들이 될 수 있는가”를 말할 때 철저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일”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고, 아들의 영을 부어주신” 분은 하나님이다. 우리가 한 것은그저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공로나 율법적 행위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아들로 살아가는삶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가능해지는 능동적 삶이다. 즉, 아들은 이제 마음대로 방탕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써” 아들다운 거룩과 사랑을 나타낸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이 적용점을 자세히 풀어간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삶, 곧 사랑과 희락, 화평과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 절제가 흘러나오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더욱 실제적인 목회 현장에서 반복하여 강조한다. “복음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힘을 지녔고, 그 변화는 본질적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정체성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교회 내 성도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혹은 스스로 정죄받아 두려움에 빠지는 이유는, 많은 경우 “내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다. “종교적 의무를 다 해야만 안전하다”는 마음이 강해지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보다 규칙 준수와 형식이 앞서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서로를 비교하고, 서로를 판단하며, 또 다른 멍에를 만들어내기 쉽다. 갈라디아 교회가 직면했던 문제가정확히 이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확신할 때, 마치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 앞에서도 자신의 신분을 흔들리지 않고 선언하셨듯, 우리는 삶의 수많은 압박과 유혹 앞에서도 당당히 서게 된다. 그 정체성이 중심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자녀는 아버지의 풍성함을 알고 있고,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죄와 싸울 때도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확신을 품고 힘있게 살아간다. 당장의 상황이 힘들고 연약해 보여도, “그리스도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후12:9)는 바울의 고백처럼 오히려 우리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 영광이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 4장을 설교할 때, 바울이 자신의 육체적 연약함을 노출하고 갈라디아 교인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장면(갈 4:13-15)을 자주 언급한다. 바울이 그처럼 약해 보이는 존재였음에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눈이라도 빼어주려 할 정도로 뜨겁게 환대했다. 그것은 율법적 의무가 아닌 복음적 사랑에 근거한 태도였다. 그 아름다운 모습이 나중에 율법주의자들의침투로 인해 사라지고 말았으니, 바울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 우리도 교회 안에서 어떤 형제를 처음 만났을 때 복음 안에서누렸던 뜨거운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정죄하고 분열하는 모습으로 바뀔 때가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갈라디아서 메시지를 다시금 붙들고,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를 자문해봐야 한다.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다시 종으로 돌아가려 하느냐”고 간곡히 호소한다. 이것은 단지 옛 율법 체제로 돌아가는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약점과도 직결된다. 우리는 마음 한편에 늘 “착하게, 바르게, 법을 지켜야”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의롭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복음이 분명히 밝힌다. 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 믿음은 ‘아들의 관계’ 속에서 꽃피운다. 아들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마음을 알고, 그것을 순종으로 실천하면서도율법적 억압이 아닌 사랑의 동력으로 움직인다. 이 미묘한 차이가 종교적 삶과 복음적 삶을 가른다.

갈라디아서 4장을 오늘날 교회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면, 교회 안에 숱하게 들어온 “초등학문”적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의 방법론이나 심지어 기독교를 표방하는 율법주의적 가르침도 때로는 초등학문이 될 수 있다. 겉으로 볼 때 훌륭하고 선해보여도, 만일 그것이 십자가 은혜의 복음 위에 서 있지 않고, 인간적 의무와 성취만을 강조한다면 그 역시 우리를 종으로 만드는초등학문이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가차 없이 “다시 종노릇하려 하느냐”고 비판하며, 거짓 교사들이 교인들을 이간질하고 미움의 불씨를 퍼뜨리는 현실을 직시한다. 이간질과 분열, 거짓, 미움, 정죄는 복음이 지향하는 사랑과 자유와 정반대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 삶에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지키고 구현할 수 있을까? 먼저, 말씀과 기도로 늘 자신이 받은 구원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되었으니, 그 사실을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까지 깊이 새겨야 한다. 둘째로,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말하는 “아들의 영”은 바로 성령이시다.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할 때, 우리는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고, 그 친밀한 교제 속에서 세상에 대해 담대해진다. 셋째로, 우리의 자유가 곧 사랑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종교적 의무에 따라 형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진 대로 이웃을 섬기고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다. 그럴 때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 말하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는 말씀이 실현된다.

결국 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에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라고 한 데는, 아들됨의 실제가 성도 개개인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의 육체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를 “예수 그리스도 대하듯” 여기며 폭발적인 사랑을 보여주었던 때를 회상시키며, 그 시절의 사랑과 자유로 다시 돌아오라는 초대이기도 했다. 우리도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초심이 사라지고 형식과 습관에 길들여져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자기 의를 세우려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갈라디아서 4장의 메시지를 붙들어야 한다. 과연 나는 아들로서 자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시 종의 길로 퇴보하고 있는가?

장재형목사는 이 질문을 늘 가슴에 새기고, 교회 공동체와 개인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라고 권면한다. 복음은 한 번 믿고 끝나는교리가 아니라, 날마다 살아내야 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며, 아들의 영이우리 안에 거해야만 비로소 꽃을 피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오셔서 우리를 속량하셨고, 우리가 복음으로 살아갈때 모든 율법의 요구가 오히려 자연스럽게 성령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이 바울 신학의 정수다. 우리가 이를 잊지 않고 ‘자유함을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늘 성찰할 때, 교회 안의 분열과 거짓 가르침, 인간적 규범에 대한 집착 대신, 오히려 사랑과 성령의 열매가 충만한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다.

정리하자면, 갈라디아서 3장 23절부터 4장 7절까지 이어지는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종’과 ‘아들’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 복음의능력을 증언한다. “너희는 아들이다”, “아들이면 유업을 이을 자다”라는 그의 선언은, 교회가 다시 종의 멍에로 돌아가려는 어리석음을 꾸짖고, 한편으로는 새롭게 세워지는 아들로서의 자의식을 고취한다. 이것은 구약 역사 속에서 율법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가 진정한 아들ship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가 내포하는 복음적 정수와 은혜의 핵심을 놓치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성도들이 이 자유를 실제 삶에 적용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아들 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이나 의무감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놀라운 자리에 서 있다. 그 자유와 사랑의 관계를 날마다 누리고 증거하는 것이, 갈라디아서 4장이 오늘의 교회에 던지는 강력한 호소이자 기쁨의 초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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