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3장과 4장은 인류 역사를 이해하는 가장 심층적인 관문이다. 장재형(장다윗, 올리벳대학교)목사는 이 두 장을 통해 창세기 1–2장의 “심히 좋았더라”는 창조 세계와 정면으로 대비되는 타락의 구조를 드러내며, 아담과 가인의 죄를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공유한 영적 패턴으로 읽어낸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이 관점에서 볼 때 단지 막연한 보호 기도가 아니라 바로 창세기 3장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게 해 달라는 절박한 요청이다.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사탄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결코 하나님과 대등한 또 다른 신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가 스스로 주어진 지위를 버리고 변질된, 곧 타락한 피조물일 뿐이다.
성경은 창세기 3장의 뱀을 모호하게 두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못 박음으로써, 에덴동산의 뱀과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등장하는 큰 용을 동일 선상에서 연결한다. 이 옛 뱀의 심층을 비추는 거울이 바로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이다. 두로 왕과 바벨론 왕에 대한 예언적 풍자 속에서, 장재형목사는 단지 한 나라의 폭군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영적 실체, 곧 “아침의 아들 계명성”으로 불리는 루시퍼의 교만과 몰락을 읽어낸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라는 탄식은, 본래 빛을 비추도록 지음 받은 천사가 자기 자리를 떠나 창조주의 자리를 넘보다 추락한 비극의 절정을 웅변한다. 유다서 1장 6절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 흑암 속에 영원한 결박으로 가두어졌다고 증언하는 대목은, 타락의 본질이 단순한 규범 위반이 아니라 “제 자리를 버린 것”임을 분명히 해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천사들의 타락에서 인간 죄성의 원형을 본다. 우리가 짓는 모든 죄를 깊이 추적해 들어가면, 결국 루시퍼가 먼저 걸어간 길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예수님은 종교적으로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단언하신다. 이 말은 충격적이지만, 인간이 중립적 존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어떤 아버지의 형상을 닮아 가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초대교부 터툴리안과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를 논한 것도, 결국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사탄의 거짓과 욕망의 구조 안에 포획되어 있다는 이 성경적 진단을 신학 언어로 풀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사탄의 꼬리가 끌어다가 땅에 던진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은 타락한 천사들의 엄청난 규모를 상징하는데, 장재형목사는 이들이 역사와 문화, 권력과 이념의 배후에서 얼마나 촘촘히 작동하는지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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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1장 7절은 소돔과 고모라가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타락한 천사들의 욕망과 맞물린 인간의 왜곡된 성적 욕망의 극단적 표현으로 읽는다. 그에게 있어 돈과 성은 사탄이 가장 손쉽게 사용하는 두 축의 유혹이다. 고대 근동 세계의 바알과 아세라 숭배, 자식을 불에 통과시키는 몰렉의 인신제사,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만든 금송아지 우상은 모두 성과 물질, 그리고 생명에 대한 왜곡된 숭배가 한데 엉켜 있는 사건들이다. 원래 하나님께 드려지는 최고급 제물이었던 소의 형상이 몰렉의 우상으로 둔갑해 어린아이의 피를 요구하게 되었듯,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영광과 예배를 가로채어 자신을 위한 속된 숭배로 비틀어 버린다. 오늘날 맘몬과 바알은 더 이상 돌과 나무로 세워진 신상이 아니라, 성적 쾌락을 상품화하고 인간의 존엄마저 가격표를 붙이는 문화와 구조로 존재한다.
이 거대한 왜곡의 배후에 있는 천사들을 장재형목사는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존재”로 이해한다. 천사는 단순한 에너지나 힘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는 영적 인격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순종이 강요가 아니라 자유의지에 의한 응답이 되기를 바라셨기에, 천사에게도 인격과 자유를 부여하셨다. 그렇기에 천사의 타락은 하나님 입장에서 눈물 나도록 아픈 사건이다. 원래 서로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기쁨으로 노래해야 했던 존재들이, “내가 오르리라,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아지리라”는 교만 속에서 반역의 길을 택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우주적 비극이다.
이사야 14장은 타락한 계명성의 마음속 독백을 세밀하게 기록한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이 반복되는 “내가”의 언어 속에 교만의 핵심이 응축되어 있다. 피조물이면서 창조주와 자신을 나란히 세우려는 자율성의 극치, 자신의 위치를 넘어 하나님의 영역을 점유하려는 욕망이 바로 타락의 본질이다. 이와 정반대에 서 있는 분이 빌립보서 2장에 묘사된 그리스도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케노시스, 곧 자기 비움의 길을 걸으신 그리스도는, 신이면서 인간처럼 낮아지셨고, 루시퍼는 인간이면서 신처럼 높아지려 했다. 한쪽은 자기를 높이다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으로 떨어졌고, 다른 쪽은 자기를 낮추셨기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은 이 두 길의 갈림길에서 인간이 택한 선택을 보여준다. 선과 악을 규정하고 생사와 축복과 저주의 경계를 그으실 수 있는 주권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한 분뿐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단지 금지된 과일 목록이 아니라, 선악 판단의 주체가 하나님이어야지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뱀은 교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비튼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실이 아닌 과장을 던져 놓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여자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답하며 어느새 불신의 정서를 내면에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손을 대고, 결국 입으로 가져가는 이 과정은 욕망의 성장 구조를 상징한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로 끝나는 이유는, 죄가 외적 행동에 앞서 마음의 탐심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내면의 죄 구조를 겨냥한 선언이다.
뱀의 정점에 이르는 거짓말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을 정면으로 뒤집는 이 선언 속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철저한 불신과, 인간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오만이 숨어 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는 유혹은, 하나님 없는 도덕, 하나님 없는 진리, 하나님 없는 주권을 약속하는 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해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신조와 다르지 않다고 진단한다. 절대 진리는 없고,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상황과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주장, 곧 상황윤리(situational ethics)는, 본질적으로 “선악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다”라는 뱀의 말을 철학적으로 정교화한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시며, 생명나무의 길을 화염검으로 막으신 것은, 단순한 응징이 아니라 타락한 상태를 영구화하지 않으시려는 자비다. 만약 하나님이 선악의 기준을 빼앗아 든 인간이 그 상태로 영생까지 얻어 버리도록 내버려 두셨다면, 우주는 영원한 반역과 혼돈의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심판 속에 숨은 보호, 저주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구원의 장치를 마련하신 이 장면에서, 장재형목사는 신정론적 오해가 풀리는 지점을 본다. 하나님은 타락을 방관하시는 냉담한 신이 아니라, “죽을까 하노라”며 인간을 향해 떨리는 마음으로 경고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이제 시선을 욥기로 돌려 보면, 타락한 천사들의 운명이 보다 선명해진다. 전통적으로 구약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책으로 여겨지는 욥기는, 이 땅의 고난을 둘러싼 하늘 법정의 장면을 보여 준다. 사탄은 하나님 옆에서 인간을 참소하는 자로 등장한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는 질문 속에서, 그는 인간의 경건마저 거래와 조건의 틀로 환원시키려 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타락한 영들을 즉각 멸하실 수 있지만, 공의의 하나님은 인간의 신실함과 사탄의 거짓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과정을 허용하신다. 그 사이에 사탄은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을 뒤에서 조종한다. 에베소서 6장12절이 묘사하듯,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세상 왕들이 때로 “용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그 배후에서 사탄의 영이 구조와 제도를 통해 사람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여기서 결정적 전환을 가져온다. 예수님은 “강한 자를 결박하는 자”로 오셨다. 마태복음 4장의 광야 시험에서 예수님은 루시퍼가 동원했던 방식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유혹에 맞닥뜨리신다. 경제적 욕망을 자극하는 떡의 시험, 종교적 과시와 기적을 이용한 성전 꼭대기 시험, 정치적 지배와 영광을 약속하는 천하 만국의 시험.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기 감정이나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의 칼날로 응답하신다. 선악의 기준이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사실을 몸소 증언하신 것이다. 시험이 끝난 후 “마귀는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 수종들었다”는 구절은, 유혹을 이긴 자에게 수여되는 영적 권세와 위로의 상징이며, 누가복음 10장 18절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승리가 단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우주적 질서를 재편하는 사건임을 보여준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고, 이 권세 안에서 교회는 여자의 후손으로서 뱀의 머리를 짓밟는 존재로 부름 받았다.
창세기 4장은 에덴의 타락이 인간관계와 사회적 구조 안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가인의 제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한 예배 행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문제는 제사의 형식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와 믿음, 곧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내용이었다. 가인은 거절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보라는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분노와 시기심을 붙든다. 하나님은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경고하시지만, 그는 이 말을 듣지 않는다. 문 앞에 웅크리고 있는 죄의 형상은, 에덴동산에서 뱀이 다가오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죄를 다스리지 못한 가인은 결국 동생 아벨을 들로 유인해 살해함으로써, “처음부터 살인한 자”인 마귀의 형상을 재현한다.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깨뜨렸다면, 가인의 살인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파괴한 최초의 사건이다. 이 두 장에 인류 역사의 비극적 패턴이 농축되어 있다.
이 모든 혼돈의 근저에는 진리에 대한 왜곡이 있다. 요한복음 8장 44절은 마귀를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는” 존재,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규정한다. 오늘 세계가 진리와 거짓의 경계를 상실하고, 정보와 이데올로기, 여론과 감정의 소음 속에서 무엇이 옳은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현실은 단지 기술 문명의副작용이 아니다. 선악 판단의 자리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떼어 내어 인간의 상황과 취향으로 옮겨 놓은 결과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절대는 없다”고 말할 때, 실제로는 “나의 감각과 선택이 절대 기준”이라는 또 다른 절대를 세우는 셈이다. 이처럼 오늘의 사조는 모양만 바꾸었을 뿐, 본질에서는 에덴의 뱀이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다.
이에 반해 장재형목사는 파스칼의 고백을 인용하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한다. 이 하나님은 추상적 제일 원인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시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시며, 선지자를 죽이는 도시에 대하여 슬퍼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다. 예수님의 눈물은 단지 죽음의 비극 때문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이 그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지 못하는 인간의 완고함에 대한 슬픔이었다. 이 하나님은 오늘도 타락의 굴레 안에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리다. 네가 선악의 기준이 되지 말고, 나의 말씀과 나의 아들을 바라보라.”
결국 장재형목사가 창세기 3–4장과 주기도문, 선악과와 루시퍼, 가인의 살인과 현대 문명의 우상까지를 하나의 선으로 꿰어 제시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더 이상 영적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히브리서 5장 13–14절이 말하듯 “젖을 먹는 자는 어린아이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이며, 단단한 음식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의 몫이다. 선악의 주체가 되려 했던 교만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선과 악을 분별하는 감각을 훈련받는 것이 영적 성숙의 핵심이다.
주기도문의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그렇게 하루하루 우리의 존재를 지탱하는 영적 호흡이 된다. 이 기도는 유혹과 시험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시험 속에서 악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참소자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에덴의 실패와 가인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지켜 달라는 간구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빛으로 임하실 때, 어둠은 머무를 자리를 잃는다. 루시퍼가 빛을 흉내 내며 스스로 계명성이라 자처했지만, 참된 새벽별은 계시록 22장에서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 밝히신 그리스도다. 여자의 후손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분의 마음을 품고, 그분이 보여주신 겸손과 순종의 길을 따라갈 때, 우리는 결국 뱀의 머리를 짓밟으며 사탄의 거짓과 우상을 분별하고 이기는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의 한가운데에서,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권면하듯, 우리는 성경을 깊이 알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선악을 분별하는 장성한 자로 성장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타락한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에게 주어진 가장 실제적이고도 영광스러운 부르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