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고별설교 – 장재형목사

Ⅰ. 사도행전 20장의 배경과 바울 사도의 모범 

사도행전 20장 17절부터 35절까지의 본문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서 불러 모아 마지막으로 권면하고 작별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는 흔히 ‘바울의 고별설교’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고별의 말씀 안에는 바울 사도의 사역 철학, 복음 전파의 핵심, 그리고 교회의 존재 이유가 매우 밀도 높게 압축되어 있다. 특히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구약형 교회와 신약형 교회의 차이점을 심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조하는 텐트메이킹(Tentmaking, 이하TM) 사역의 의미와 중요성을 되새길 수 있다.

바울은 밀레도라는 해안 도시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약 50km 이상의 거리를 이동하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함께 모인 그들에게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또 무엇을 가르쳐왔는지 너희도 알고 있다”는 회고의 말을 먼저 전한다(행20:18 참조). 이는 바울 사도가 그들의 눈앞에서, 모든 것을 오픈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지도자가 얼마나 투명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자기 삶을 통해 복음의 진정성을 보여야 하는가를 이 짧은 문장에서 직감할 수 있다. 바울은 사역 현장에서 위선을 떨거나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살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겸손과 눈물로’(행 20:19) 살아왔음을 장로들에게 상기시켰다. 이 말에는 그의 사역 태도가 담겨 있다. 곧 겸손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종의 자리, 섬김의 길을 의미한다. 그리고 눈물이란 사역자가 단지 머리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영혼을 깊이 사랑하고 품고자 할 때 흘릴 수밖에 없는 마음의 표현이다.

교회의 역사에서, 그리고 구원사(救援史) 전반에서 볼 때, 바울 사도가 세웠던 신약형 교회는 구약적 제사장 체계에만 의존하는‘구약형 교회’와 분명히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구약형 교회는 십일조에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형태라고 단순화해서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십일조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 재정과 운영 전반을 십일조만으로 운영하는 데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장재형목사 역시 같은 맥락을 이야기한다. 신약형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스스로 자립하여 복음을 전하며, 성도들이 힘을 모아 교회를 세우고 돌보는 길을 걸어간다. 이러한 신약형 교회의 모습은 구약형 교회가 가진 단일 재정 의존 구조를 넘어서, 바울 사도가 보여준 자비량(自費糧) 선교의 모범을 현대 교회가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대답을 제시해 준다.

바울이 사역 중에 겪었던 고난은 적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여긴 바울을 죽이려고 했고, 바울은 심지어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복음 전파에 전념했다(행 20:24 참조). 여기서 우리는 “왜 바울이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죄인을 구원하는 길”의 절대 가치를 깨달았고, 이를 전하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어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각 도시에서 복음을 전할 때, ‘회개하라.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메시지를 가장 먼저 강조했다(행 20:21 참조). 죄를 지적하고, 그 죄를 예수님께서 대속하셨음을 선포하는 것. 이것이 초기 교회 사도들의 공통된 복음 메시지이기도 했다. 또한 회개가 일어나야 진정한 구원이 시작된다는 것을 바울은 분명히 알았다. 회개 없이 죄 사함도, 참된 구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가 여러 차례 설파해온 “교회론과 종말론의 연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기독론과 구원론, 종말론이 기독교 3대 교리라고 했을 때, 종말론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향해 요구하는 것은 “어떤 교회를 세울 것인가”에 대한 숙고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자들이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은 교회 세움이다. 교회란 그리스도가 핏값으로 사신 곳이요, 성도들은 그 교회의 지체로서 세상의 거짓과 유혹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 교회를 바르게 지키고 세우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이들의 최종적 과제이며, 곧 교회론으로 귀결된다는 설명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재정 문제 혹은 교세의 침체로 인해 세상에 팔리거나 문을 닫는 상황을 쉽게 볼 수 있다. 시장에 나온 교회가 수백, 수천 개에 이른다는 보도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본래 주의 핏값으로 세워진 거룩한 공동체가 어찌하여 세상 부동산 시장에 내몰리는가? 이는 신앙이 약화되고, 교회가 구약형 교회 모델에 갇혀 버린 채,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가능하다. 더 깊이 들어가면, 본문에서 바울이 예언한 대로 교회 내부에 ‘사나운 이리’가 들어와 양떼를 해치고(행 20:29),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행 20:30)이 일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속화, 다원주의, 물질주의, 소비주의 등 수많은 이리가 교회 안에 침투하여 복음의 본질을 가리고, 성도들의 영혼을 분산시킨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며, 교회가 다시금 사도적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핵심에는 바울 사도의‘텐트메이킹’이 놓여 있다. 이는 인간의 생존 문제인 “의식주”를 해결하면서도,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돌보는 이중적 사명을 동시에 수행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구약형 교회처럼 단지 제사장 혹은 성직자만이 율법에 규정된 십일조에 의해 생활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여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필요하다면 직접 일하여 재정을 마련함으로써 사역 자체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바울은 실제로 고린도에서 천막을 만들고 팔아 자기 생계를 충당하면서 복음을 전했다(행 18:1-3 참조). 그리고 필요할 때에는 동역자들이나 다른 교회가 보내주는 재정적 도움을 받아 가르치는 일에 더 집중하기도 했다(행 18:5). 이처럼 “내가 손으로 벌어서 나와 내 동행들의 필요한 것을 썼다”는 바울의 고백(행 20:34)은 신약형 교회의 자립성과 건강성을 잘 보여준다. 어떤 사역자도 스스로 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의 물질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이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가진 기술이나 재능을 활용하여 성도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이 주고 섬기는 쪽으로 에너지를 쏟는다.

이러한 형태가 가진 장점은 분명하다. 첫째, 교회 지도자가 세속적인 탐심이나 물질적 유혹에 빠질 여지가 줄어든다. 둘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저들이 복음 때문에 스스로 자립하는 모습이 얼마나 진정성 있는가”라는 선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셋째, 교회 내부에 물질이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사역자가 복음을 전하는 데 본질적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넷째, 교회 전체가 자발적인 헌신과 사랑의 나눔으로 결속력을 키우게 된다. 다섯째, 받은 복을 약한 이웃에게 돌리는 통로가 늘어난다. 바울이“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라”(행 20:35)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과 직결된다.

구약형 교회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델만을 절대화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경계해야 함을 바울의 사역, 그리고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은 함께 일깨운다. 구약 시대에는 분명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제사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지파로부터 물질적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함께 교회의 형태도 달라졌다. 교회는 비단‘성전’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서로 기도하며 말씀으로 연결된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는 본문의 선언은, 교회가 주님의 핏값으로 세워진 신성하고도 존귀한 공동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 메시지는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바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교회는 세상의 거센 파도, 세속화와 자본의 논리에 쉽게 휩쓸려서는 안 되며, 그렇기에 적절한 대안으로서 텐트메이킹 사역이 제시될 수 있다. 물론, 이는 모든 교회가 무조건 사업이나 장사를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교회는 원칙적으로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 성도 양육을 최우선으로 삼되, 그 과정에서 필요한 재정을 자생력 있게 마련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라는 취지다. 더불어, 사역자나 리더가 “받는 게 아니라 먼저 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교회들이 대거 문을 닫고, 부채를 감당 못해 부동산 시장에 교회 건물을 내놓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교회가 건강성을 잃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힘주어 말한 것은 결국 한 가지, “내가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것을 기억하라”(행 20:31)는 것이다. 이는 지도자들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지도자가 아무리 화려한 언변과 지식을 가졌더라도,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뜨거운 사랑과 눈물, 그리고 책임감을 가지고 머무르지 않으면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다 가르쳤기에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고까지 말한다(행 20:26-27). 교회가 쓰러지고 세상에 팔려나가는 것은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냐” 하는 준엄한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구약형 교회와 신약형 교회의 비교를 통해 “시대적 요청”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세속 이념과 상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다원주의, 물질만능주의, 쾌락주의 등 온갖 이단적·세속적 사조가 혼재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교회가 부흥하던 과거처럼 “십일조나 헌금만으로 목회자가 생활을 보장받는 구조”에 머무르기보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텐트메이킹을 통해 세속의 언어를 아우르고, 동시에 변질되지 않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되 생계 문제 때문에 중단되거나 왜곡되지 않는 길”이며, 신약의 정신을 현대에 되살리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는 결코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교회사를 조금만 훑어봐도, 초대교회뿐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의 여러 운동들에서‘자비량 사역’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마르틴 루터는 수도원적 전통을 비판하면서도, 성도들이 자립하여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중요성을 설파했다. 장 칼뱅 역시 교회가 세속 활동, 직업윤리 등 다양한 측면에서 사회를 변혁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보았다. 근현대에 들어서는 의료나 교육, 구호 활동 등을 통해 교회가 사회적 공헌을 실질적으로 해나감으로써 복음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사례가 많다. 문제는 이 모든 흐름이 어느 순간 특정 제도나 건물 중심의 교회 운영으로 국한되면서 점차 생기를 잃고, 자립 정신도 소멸되어 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다시 사도행전 20장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행 20:28)고 한 경고의 음성을 되새겨야 한다. 양떼를 위한 진정한 돌봄은 단순히 예배당 안에 모아두고 설교만 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교회의 재정이 궁핍하다고 해서 복음이 약화되면 안 되며, 재정이 풍성하다고 해서 세속적 방식으로 과잉 사용해도 안 된다. 결국, 교회가 주의 피값으로 세워졌다는 인식을 갖고, 자신부터 영적으로 깨어 일어나는 일, 그리고 다양한 사역 방안 중 오늘날 가장 실천적인 대안으로 텐트메이킹을 주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행20:32)라는 구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교회가 세워지고 유지되는 근본 힘은 사람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거하는 교회, 말씀을 실천하는 성도, 말씀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공동체가 되면, 재정적 궁핍이나 외부의 공격적 비방에 흔들리지 않는다. 반면, 말씀이 약해지면 어느 순간 교회가 “사나운 이리”에 의해 잠식되고, “자기를 따르게 하려는 어그러진 말”을 퍼뜨리는 거짓 교사나 이단에게 기회를 주게 된다. 우리는 한국 교회뿐 아니라 세계 교회가 겪고 있는 이단 문제, 지도자들의 윤리적 타락 등 많은 사례를 통해 이를 학습했다.

이제 교회는 사도행전의 원형적 모델, 바울이 보여준 자비량 선교와 복음 전념의 자세로 재무장할 필요가 있다. 장재형목사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것처럼, ‘복음 전념’에는 반드시 ‘자기 손으로 일하여 쓰는’ TM적 마인드가 결합되어야 한다. 이는 목회자나 교회 리더십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함께 나누어야 할 교회의 사명이며,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어록을 우리의 삶으로 증명해 나가는 과정이다. 물론 목회 현장에서 탄탄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 바울에게 디모데와 실라 같은 동역자들이 재정을 전해주었듯이, 어떤 사람이 복음을 위해 넉넉히 도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지원이 당연시되거나 제도적으로 고착화될 때, 교회의 내적 생동감은 쉽게 사라지곤 한다. 결국 이 땅 위에서 교회가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교회의 리더들이 반드시 앞장서서 지키고 전해야 할 핵심은 “내가 복음을 전하고, 또 복음 때문에 손수 일하겠다”는 각오와 실제 실천이다.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바울이 보여준 그 ‘손으로 벌어 쓰며, 밤낮으로 가르치며,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열정이다. 그리고 이는 점차 쇠락하고 있는 교회들을 구체적으로 살리는 해법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재형목사가 직접 “쓰러져 가는 교회 건물을 구입해 복음의 전초기지로 재활성화”하는 사례가 그렇다. 건물을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미 세워졌으나 사라질 위기에 놓인 교회 재산과 그 지역의 영혼을 보존하고, 다시 복음 전도의 기폭제로 삼는 데 목적이 있다. 재정은 TM과 헌신으로 마련하고, 영적인 부분은 사역자와 공동체의 연합된 기도로 채워나가는 식이다. 그렇게 해서 되살아난 지역 교회가 주변의 방황하는 영혼들을 품어내고, 다시금 건강하게 자립하여 또 다른 교회나 선교지를 도울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기대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행 20:24)는 유명한 선언은, 지금 우리 시대에도 동일한 울림을 준다. 교회는 거창한 프로그램이나 이벤트가 아니라, 한 영혼을 살리고 또 그 복음에 생명을 바치는 자들의 눈물과 수고와 헌신 위에 세워진다. 28년 전부터 이런 정신으로 교회를 시작해왔다는 장재형목사의 고백은, 바로 이 선배들의 길을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대해 깊은 물음을 던진다. “한 달에 한두 번씩 마태복음 23장을 읽으면서, 지도자가 외식하는 모습이 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점검한다”고 하는 모습이야말로 사역자와 성도 모두가 본받아야 할 태도가 아닌가 한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의 고별설교는 사역자의 자세, 교회의 본질, 복음을 전해야 하는 방법론을 하나의 결론으로 모은다. “다 가르쳤으니 이제 너희가 넘어지면 너희 책임이다”라는 바울의 어투는, 그가 얼마나 철저히 교우들을 진리로 무장시켰는지를 입증한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회개’라는 토대가 놓여 있다. 회개 없이 아무리 교회를 꾸미고, 아무리 멋진 설교를 해도 그것은 본질을 벗어난 외식에 불과하다.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자들이, 이제는 세상으로 들어가 텐트메이킹을 통해 복음을 전하며 약한 이를 도우라는 것이다.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직접 충당했다”고 바울이 말할 때, 그는 사역자가 세속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또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가장 근본적 장치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문을 통해 정리해본 바울 사도의 고별설교는 단순히 1세기 에베소교회에만 적용되는 교훈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더 나아가 전 세계 교회가 직면한 난국을 헤쳐나갈 때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다. 주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가 어찌하여 버려지고 팔려나가야 하는가? 왜 교회가 빚에 시달리고, 물질적 궁핍과 비전의 부재로 인해 문을 닫아야 하는가? 교회는 재정적 풍요를 누릴 때마다 세속화의 유혹에 노출되고, 재정적 빈곤에 처해 있을 때는 좌절이나 부끄러움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본문이 보여주듯, 바울은 안팎으로 온갖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복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팀도, 그와 함께 텐트메이킹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필요하다면 동역자들의 지원을 받아 더욱 가르치고 전파하는 길을 걸었다.

Ⅱ. 텐트메이킹(TM) 사역과 교회 세움의 실제

이제 텐트메이킹 사역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장재형목사가 헌신예배에서 강조하는 이 사역의 실제적 가치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살펴보자. 텐트메이킹(Tentmaking, 이하 TM)은 말 그대로 바울이 천막을 만들어 팔면서 스스로 생계를 충당했던 것에 유래한다. 교회사 속에서는 ‘자비량 선교’로도 불리며, 선교지나 목회 현장에서 재정 지원 없이 혹은 최소한의 지원만으로 현지인들을 돕고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론을 가리킨다. 현대에는 직업을 가지고 해외나 국내 선교지에서 자립하여 복음을 전하는, 소위 ‘전문인 선교사(Professional Missionary)’ 형태로 확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가 주목한 TM은 단순히 “세상 일도 하고, 선교도 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가 구약형 모델에 매몰되지 않고, 신약형 모델로 성도 전체가 복음 전파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사역적 패러다임이다. 교회가 사업체를 운영한다거나,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TM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발적으로 벌어서 쓰고, 더 나아가 교회를 세우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영적·물질적 통로가 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에는 5개의 주요 사역이 있다고 한다. 그가 설명하길, 모든 성도는 그 중 하나의 사역에 속해 있거나, 혹은 거기서 도움을 받거나,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그중 마지막으로 TM이 정식 사역으로 확립되어 헌신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 점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교회 개척 초기부터 이미 TM 정신이 깔려 있었지만, 이제 와서야 ‘공식적인 사역’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어느 정도 성숙기에 접어들었고, 더 체계적으로 TM을 통해 복음 확장을 추진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로 볼 수도 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아굴라, 브리스길라와 만나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천막을 만들며 살았다는 사실(행 18:1-3)은 TM 사역의 고전적 예시로 자주 인용된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명령으로 로마에서 추방된 유대인이었는데, 믿음이 깊고 지식적으로도 뛰어난 부부였다. 이들이 바울과 함께 천막을 제작·판매하면서 그 수익으로 생계를 꾸려갔고, 동시에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다. 전통적으로 브리스길라는 신앙이 대단히 깊어, 여러 성경 구절에서 그녀의 이름이 남편보다 먼저 언급된다고 전해진다(행 18:8, 롬 16:3 등). 또한, 이 부부는 아볼로 같은 지적인 설교자를 바르게 지도해줄 정도로 성경 지식과 영적 분별력이 뛰어났다(행 18:26). 이런 사건은 TM이 단순한 ‘부업’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사례들을 바탕으로, TM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를 정리한다. 교회의 리더는“성도들을 무조건 지원하라, 또는 헌금을 더 가져오라”라고 요구하기 전에, 오히려 자신이 먼저 바울처럼 일해서 재정을 마련하고, 그 수익으로 어려운 교회나 성도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교회는 단순히 소비 단위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산하고 나누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행 20:35)는 주님의 말씀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구약형 교회의 일방적 십일조 의존 체계를 넘어서는 신약형 교회의 모델을 보여준다.

모든 목회자, 모든 성도가 반드시 TM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생계가 넉넉하여, 전적으로 복음 사역에만 전념해도 될 수 있다. 또 어떤 교회는 역사와 규모가 커서 재정이 충분해, 목회자가 따로 생업을 갖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지원’과 ‘공급’에 완전히 의존하게 되어, 복음 전파의 본질이 흐려지거나, 교회 안에 영적 긴장이 무뎌지는 현상이 자주 생긴다는 데 있다. 바울은 디모데, 실라와 같은 동역자들이 가져다주는 헌금을 받을 때, 더 열심을 내어 가르쳤다.즉, 누구에게나 지원을 받았을 때 더욱 복음을 위해 헌신했고, 그 지원이 끊기면 다시 자신이 일어서서 천막을 만들었다. 이 영적 역동성이야말로 바울 선교의 열매를 풍성하게 한 요소였고, 그가 다시금 에베소 장로들을 만났을 때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었던 비결이 되었다.

장재형목사가 오랫동안 목회 현장에서 실천해온 TM 사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가 사업체를 직접 운영하거나, 혹은 교인들이 자신의 직업 현장에서 수익을 내고, 그것을 함께 모아 쓰러져 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거나, 선교지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결국 “교회가 빚을 지는 구조”가 아니라 “교회가 다른 이에게 빚을 탕감해주고 도와주는 구조”가 구현되는 것이 핵심이다. 목회자가 교회로부터 월급을 받는 것을 전면 부정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받아야 한다”고만 생각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장재형목사는 실제로 미국 전역뿐 아니라 해외 곳곳에서 문을 닫아가는 교회들을 ‘구입’하여 복음의 전초기지로 되살리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TM으로 마련한 재정, 여러 성도들이 땀 흘려 번 돈, 자발적 헌금 등을 합쳐서 선교와 구제, 교회 살림에 쓴다. 이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겠다”는 신약 교회의 정신과 정확히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노력할 때, 그 방향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교회의 리더십과 모든 성도가 함께 고민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본문에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난 후에 발생할 위험들—“사나운 이리가 교회에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고”(행 20:29),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행 20:30)—을 미리 경고했듯이, 교회가 바깥으로 나가 사역을 할 때, 세속적 물결과 각종 이단이 어김없이 침투하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늘 깨어서, “3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했던” 바울의 마음을 이어받아야 한다. 텐트메이킹이든, 어떤 다른 사역 방식이든, 궁극적으로 영혼 구원과 복음 확장이라는 목적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TM 사역은 교회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이상으로, 교회의 영적 체질을 바꾸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성도 개개인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직장·비즈니스·학업’을 통해 “내가 이 일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의 신앙이 예배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삶 전체에 스며들게 된다. 나아가 TM을 통해 얻은 수익이 지역교회, 해외선교, 구제와 봉사, 교육사역 등에 투입되면, 자연스럽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복음적 삶의 방식이 공동체 안에 퍼지게 된다. 헌신예배를 드리는 것도, 이 정신을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우리 모두 함께 손을 걷어붙이고 일합시다. 우리 자신을 희생하며, 어려운 이웃을 살립시다. 그리고 무엇보다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다짐을 새기는 의식인 셈이다.

 “바울처럼 텐트메이킹을 하라”는 구호를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여, 무작정 경제 활동에 뛰어들거나 사업 확장에 집중하다 보면, 복음 전도의 본질이 흐려질 위험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여러 차례 “성경의 원리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텐트메이킹을 했던 바울 역시, 그는 천막을 만들어 돈을 벌기에 앞서 언제나 복음 전파에 집중했다. 생계가 안 되면 스스로 벌었을 뿐, 돈을 버는 것 자체가 궁극적 목표는 아니었다. 만약 교회나 성도 개인이 TM 활동을 통해 큰 수익을 얻었다 해도, 그것을 자신만을 위해 쓰거나 부를 자랑하는 데 사용한다면, 이는 엄연히 바울 사도가 말한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는 가르침과 배치된다. 그런 식의 성공은 복음과 전혀 무관한 세속적 성공일 뿐이므로, “성령과 말씀에 자신을 의탁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는 신앙 공동체를 세우라”(행 20:27,32)는 본래 취지를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장재형목사가 교회 개척과 사역 현장에서 보여주는 직접적 예시들을 보면, 그가 TM을 실행할 때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기도와 회의, 그리고 공동체의 합의”다. 본문에서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일종의 ‘지도자 모임’을 한 뒤 고별 설교를 했다. 현재 닫히는 교회를 인수하고 살리는 사역을 진행할 때, 장재형목사와 교회의 리더십은 긴 시간 함께 기도하고 토론하며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 그리고 일단 방향이 결정되면, 중간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 교회를 재건한다. 이런 방식은 초대교회에서도 뚜렷이 나타난 특징이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교회의 진로와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행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 등).

텐트메이킹 사역은 헌신예배를 계기로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교회 내에 독자적으로 그 사역을 담당하는 부서를 두고, TM이“교회 재정을 자립시키고, 추가로 어려운 교회들을 돕고, 나아가 복음을 지경 끝까지 전파하는 통로가 되도록” 조직화하는 것이다. 이는 구약형 교회가 가진 단선적 재정 구조(십일조와 헌물 중심)에 대한 보완이자, 복음 전파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신약형 교회의 성장 모델로 볼 수 있다. “시장에 교회가 천 개, 이천 개씩 매물로 나오는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든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위기의식은, TM을 단순한 경제 활동 이상의 거룩한 사명으로 재인식하게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TM 헌신예배에서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며 문을 닫는 교회들에 대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기둥을 붙들고, 성도 각자가 회개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행 20:28)는 바울의 훈계를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교회가 세속에 물들어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 TM을 통한 자립과 봉사가 바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구체적 대답이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TM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잃어버린 초대교회의 순수성과 역동성을 되찾는 길이다. 그 길에서 지도자는 외식하지 않고, 온전한 복음을 전하며, 성도들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세상 속에서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며 복음 증거자의 삶을 산다. 교회 공동체는 그 합력한 열매로 주변의 약한 교회들을 돕고, 아직 복음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선교 자원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물결이 거센 시대에,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유일한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사도행전 20장의 바울 고별설교에서 나타나는 신약형 교회의 핵심은 ‘텐트메이킹 정신’과 맞물려 돌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가 우리에게 남긴 말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길과 진리는 오직 하나” 등은 모두 교회의 존재 방식과 방향성에 치열하게 도전해 온다. 그리고 장재형목사 역시 이 사도적 전통을 재발견하고, 오늘날 구약형 교회가 처한 현실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텐트메이킹 사역을 강조한다. 이것은 교회를 ‘만인의 제사장’이라는 신약 원리에 부합하도록 재편하고, 성도 개개인이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실천하도록 독려하는 구체적 방안이다.

교회의 기본 정신은 “내가 스스로 벌어서 약한 사람을 도우며, 복음을 위해 내 생애를 다 쏟겠다”는 각오다. 바울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 내가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칠 때까지 달려갈 수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바울 사도의 고백을 이어받아, 교회가 세워지고 사역이 확장되어도 절대 물질과 명예에 취하거나, 세상적 성취감에 휘둘리는 길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한다. 오히려 주님의 핏값으로 세워진 교회를 지키고, 시장에 매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교회들을 살려내며, 복음이 더 널리 퍼져나가도록 섬길 것을 촉구한다.

이 헌신예배에서 TM이 정식으로 세워졌다는 것은, 교회가 사역의 범주를 한층 확장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주는 삶”을 통해“지역 사회와 세계 선교 현장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동시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는 바울의 자세처럼, 교회의 재정이든 성도의 헌신이든, 그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복음을 전하고 약한 자를 돕는” 통로여야 한다는 점을 다시금 각인시키는 자리다. 곧, TM 사역을 통해 “하늘 상인”으로서 정직과 성실, 그리고 뜨거운 사랑과 눈물로 일하며, 그 수익을 기꺼이 복음에 재투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길—곧 ‘자기 부인과 희생의 길’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많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현실 가운데서, 텐트메이킹이 단지 ‘하나의 대안’이 아니라 본질적 원리로 다시금 부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바울 사도의 삶이야말로 그 길을 미리 보여주었고, 장재형목사는 교회 개척과 세계 선교 현장에서 이를 현대적으로 적용해왔다. 교회가 구약형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신약형 교회의 생동감과 역동성을 회복하려면, 바울이 말한 “내 손으로 벌어서, 약한 자를 도우며, 복음을 전한다”는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 전체가 공유하고 체계화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영혼들에게 살아 있는 복음을 전달해야 할 것이다. “일 깨어 있으라”(행 20:31)는 바울의 종말론적 호소는, 텐트메이킹이라는 구체적 사역 방식을 통해 실제로 열매를 맺는 길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장재형목사가 설파하고, 텐트메이킹 헌신예배에서 선포하는 신약형 교회의 비전이며, 교회의 장래를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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