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구조
- 올바른 신앙의 역사적·교리적 중요성
-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하심: 올바른 신앙의 기초
- 속죄, 성육신, 그리고 십자가의 구원 사건에 담긴 삼위일체 의미
- 초기 기독교 공동체(특히 고린도교회) 속 신앙적 갈등과 올바른 신앙의 역할
- 올바른 신앙의 현재적 적용: 교회 공동체와 신앙인의 실천적 삶
1. 올바른 신앙의 역사적·교리적 중요성
삼위일체(Trinity) 교리는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자 근간이며, 교회가 2천 년에 걸쳐 공통적으로 고백해 온 핵심 신앙이다. 장재형(장다윗)목사의 설교 맥락 속에서 올바른 신앙이 강조되는 이유는, 이것이 결코 추상적이거나 철학적 사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형성과 성장 과정 속에서 생명력 있게 자리 잡은 진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세상에 신이 많고, 다양한 종교적 사고와 철학적 전통이 범람하는 가운데, ‘참 하나님’이 누구이며 어떤 분이신가를 가장 분명하게 밝혀주는 신앙적 컴퍼스(나침반)와 같다.
역사적으로,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전쟁 이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AD 70년)와 디아스포라 상황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야 했다. 유대교를 모태로 삼았던 초기 기독교가 로마 제국으로 확산되는 과정 속에서, 다양한 유대교 분파(바리새파, 사두개파, 에비온주의자)와 헬레니즘 사상의 일부를 반영한 영지주의(그노시스주의) 등이 신앙공동체를 흔들며 도전해 왔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서, 신앙인들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은 무엇이고,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근본 물음 앞에 서게 되었다. 이 물음에 답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신앙고백은 점차 명료하게 형성되었다.
처음부터 “삼위일체”라는 신학적 용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약성서 어디에도 “트리니타스(Trinitas)”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직접 “삼위일체”를 교리로 가르치신 적도 없고, 바울 사도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쓴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곳곳, 특히 복음서와 바울 서신, 그리고 공동서신과 요한계시록에 걸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이 구원 사건 속에서 함께 드러나는 장면들이 누적되며, 교회는 이것이 단순한 상징이나 은유를 넘어서는 진리임을 직감했다. 교회는 오랜 신학적 사색과 토론, 그리고 공의회(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등)를 거쳐, 하나님이 본질상 한 분이시나 성부·성자·성령으로 구별되는 세 위(位) 안에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신앙고백을 확립했다.
이로써 올바른 신앙은 “한 하나님” 안에 있는 “세 위격”의 신비를 공적으로 인정하는 공교회의 신앙표준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주의나, 성령의 위격을 격하하는 다양한 이단 사상, 혹은 하나님을 단순히 세 신의 집합체로 보는 삼신론적 오해,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 못하는 양태론적 혼란이 역사 속에서 등장했으나, 정통교회는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 이러한 왜곡들을 극복하고 바른 길을 제시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삼위일체 사상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결정적 교리이다. 우상을 숭배하고 다양한 신을 섬기는 다신교 사회, 혹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무신론적·불가지론적 환경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이때 올바른 신앙은 하나님을 세계와 역사 밖에서 초월적으로만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역사에 깊이 들어오시고, 성령을 통해 믿는 공동체 안에 내재하시는 분으로 고백하게 만든다. 여기서 초월자이신 성부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와 구원을 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적·실존적 의미가 종합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믿음이 바로 올바른 신앙이며, 이는 기독교가 4세기 이후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가장 근본적인 신앙고백이 되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하심: 올바른 신앙의 기초
올바른 신앙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한국어 성경 일부 번역본에서는 13장 14절)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선포하는 축도 문구에 잘 집약되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문장은 이후 기독교 예배 전통에서 축도의 공식적 근거 구절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특히 장로교회를 비롯한 전통적 개신교회에서 예배의 마지막 순간에 목사가 손을 들어 회중에게 선포하는 이 축도는 신자들을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는 동시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교통하심 속에 살라는 선언적 의미를 지닌다.
이 문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성과 활동양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언급된다.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표현을 선호하나, 바울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맨 앞에 배치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자들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신앙 여정을 시작하는 가장 친근한 출발점임을 시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이 자격이나 공로 없이 받게 되는 무상의 선물, 즉 은혜의 근원이시다. 은혜(헬라어 ‘카리스’)란 값없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로, 율법이나 행위로는 도달할 수 없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은혜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음으로 언급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의 동기이자 출발점이다. 성부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주셨다(요한복음 3:16). 이 사랑은 결코 추상적인 관념적 사랑이 아닌, 역사 속에서 실현되고 성육신하신 아들을 통해 드러난 구체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에 초월적으로만 계신 분이 아니라, 죄와 죽음, 우상과 고통에 허덕이는 인류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들을 내어주신 분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아들이 겪은 버림받음과 극심한 고통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려는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의 절정이다. 이러한 사랑을 통해 신자들은 단지 죄 사함을 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며 참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한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교통하심”이 언급된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격으로, 단순한 힘이나 추상적 에너지가 아닌 인격적 주체이시다. 성령은 신자들을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고, 예수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요 14:26),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부어주신다(롬 5:5). 성령의 교통하심(코이노니아)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 교제, 연합, 협력, 상호 돌봄을 가능케 한다. 이를 통해 교회는 단순히 사상이나 철학에 동의하는 인간 집단이 아닌, 삼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현재적·실존적으로 체험하는 신앙공동체로 거듭난다. 성령은 과거의 예수 사건을 현재화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신자들 삶 속에 흘려보내며,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추동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시작된 구원 경험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동기 부여되고,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 현실화된다. 올바른 신앙의 기초는 이처럼 인간을 향한 하나님 전체의 사랑과 구원의 경륜 안에 놓인다. 은혜, 사랑, 교제라는 단어는 삼위 하나님의 일체적 활동을 표현하는 핵심 언어가 되어, 신자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 안에 거하며,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한다.
3. 속죄, 성육신, 그리고 십자가의 구원 사건에 담긴 삼위일체 의미
올바른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속죄(Atonement),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구원 사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공한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근본적 이유는, 하나님이 초월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각 능력이나 이성으로는 무한한 하나님께 닿을 수 없고, 우상 숭배로 물든 문화적 환경 속에서 참 하나님을 분별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셨다고 선포한다. 이 계시의 최고점은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다.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 예수는 철학적 진리나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살고, 고통받고,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최종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이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시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직접 이 세상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이 십자가 사건은 초기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현대 신앙인들에게도 여전히 큰 충격과 도전이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 제국에서 가장 극악한 범죄자에게나 허락된 형벌이었고, 유대 전통에서도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로 여겨졌다(신명기 21:23).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그 치욕스럽고 끔찍한 형벌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인간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속(救贖)의 신비를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이를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표현했다(고전 1:23).
이런 모순적 사건을 올바른 신앙을 통해 바라보면, 새로운 차원에서 의미가 분명해진다. 성부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셨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의 죄를 속량하셨으며, 성령은 이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교회와 신자들의 마음에 인쳐주신다. 십자가는 단순한 순교나 도덕적 본보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인류의 모든 죄악과 반역, 불의와 폭력이 응축된 지점에서 예수께서 그 죄의 대가를 짊어지고 스스로 속죄양이 되신 사건이다(레위기 16장의 속죄일 의식을 성취하는 궁극적 희생).
십자가에서 아들이 겪은 ‘버림받음’과 ‘어둠’(막 15:33)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인간의 죄가 얼마나 참담한지, 그리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이를 로마서 8:32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내어줌은 허용이 아닌 의도적이고 능동적인 헌신이다. 성부와 성자가 분리되는 어둠 속에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깊은 형태로 계시된 것이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부활 사건 역시 삼위일체 맥락에서 이해된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구원 경륜을 완성하셨고,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성령을 보내어 신자들이 이 승리를 자기 삶 속에서 현실화하도록 하신다. 속죄, 성육신, 십자가, 부활의 모든 사건들은 삼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집행하시는 구원 드라마의 장면들이다. 신자는 이 드라마를 성령 안에서 해석하고 체험하게 된다.
4. 초기 기독교 공동체(특히 고린도교회) 속 신앙적 갈등과 올바른 신앙의 역할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고린도전서와 후서)에서 다양한 신앙적·윤리적 문제들에 응답하였다. 고린도 교회는 당시 다양한 문화적·종교적 배경을 가진 성도들이 섞여 있었고, 우상 숭배, 성적 문란, 영적 은사 남용, 부활 신앙에 대한 오해 등 수많은 갈등과 혼란이 존재했다.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 경륜, 특히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한 복음의 본질을 재천명한다.
바울은 율법을 잘 지킨 자, 지혜로운 철학자, 능력 있는 지도자, 특별한 영적 체험을 가진 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부름받은 자들이 교회를 이루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을 자랑하거나 인간적 파당을 만들 것이 아니라, 오직 구원의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구원 이해는 고린도교회 내 부분적이고 편향된 신앙해석들을 바로잡는 기준점이 된다.
또한 바울은 여러 서신에서 성령의 은사가 공동체를 세우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강조한다(고전 12-14장). 은사는 성령의 교통하심, 삼위 하나님의 구원 목적 안에서 이해될 때 바른 용도가 생긴다. 만약 특정 은사나 지식이 신앙의 절대적 기준이 된다면, 교회는 인간적 기준에 휩싸여 분열할 것이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의 계획,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 하나님의 다양하고 조화로운 역사에 주목하면, 교회는 일치와 협력, 상호 존중을 회복할 수 있다.
초대교회가 에비온주의(예수의 순전한 인성 강조, 신성 부정), 영지주의(물질 세계를 천시하고 영적 지식에 구원을 두는 이원론),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의 전통적·율법적 틀 등과 싸워나갈 때, 올바른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구원 사역을 바르게 이해하는 견고한 토대가 되었다. 올바른 신앙은 교회가 어떤 혼란과 도전에 직면하더라도, 본질적인 구원 진리에 굳게 서게 하는 핵심 좌표 역할을 한다. 바울의 서신은 이를 구체적인 교회 현실 속에서 적용한 모범적 사례로 남아 있다.
5. 올바른 신앙의 현재적 적용: 교회 공동체와 신앙인의 실천적 삶
올바른 신앙은 결코 과거 역사의 유물이나 공의회 시대의 철학적 산물이 아니다. 이것은 매 시대마다 교회와 성도들의 삶 속에서 풍성한 의미를 발휘하는 살아있는 진리이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이, 매 주일 예배 끝자락에 목사가 손을 들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선포할 때, 신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의 부름을 다시금 받는다. 이 축도를 듣고 예배당을 나서는 이들은, 이제 일상의 자리에서 삼위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존재로 파송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을 깊게 할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속에서 구체적 실천을 낳는다.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 교회는 한 몸으로서 서로를 돌보고 섬기며,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달하는 사명을 감당한다. 이를테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서로에 대한 권면, 위로, 도우심, 나눔과 친교는 모두 성령께서 이루시는 교통의 열매이다.
또한 올바른 신앙은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는 다양한 도전에 응답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세속화, 물질주의, 소비주의, 개인주의, 포스트모던적 상대주의, 타종교와의 대화, 환경위기, 사회적 불의와 평화 문제에 직면한 교회는, 올바른 신앙을 통해 신앙의 중심을 확고히 한 채 세상과 대화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듯이, 교회는 자기 희생적 사랑과 섬김, 정의와 평화의 실천을 통해 이 사랑을 구체화할 책임이 있다.
예를 들어, 이민자와 난민, 사회적 약자, 소외된 이웃을 품는 사역 속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모두를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한다.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국적, 인종,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는 형제자매로서의 교제를 나누는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하나된 인류라는 믿음의 열매이다. 올바른 신앙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창조세계 사이의 관계를 조화롭게 바라보게 하며,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공동체와 세상을 건설하는 신앙적 동력을 제공한다.
나아가 올바른 신앙은 신자 개인의 영적 성장에도 깊은 의미가 있다. 신자들은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과 창조의 계획 속에서 자신의 인생 의미를 발견하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죄 사함과 구원을 경험하며,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신앙인은 삼위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하나님을 점점 더 닮아가는 성화를 경험하며(고후 3:18),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참여한다.
이처럼 신앙은 교리적 구호나 신학적 스펙타클이 아닌, 교회가 존재하고 성장하며 세상을 섬길 때 반드시 붙들어야 할 핵심 진리이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이 사랑을 따라 살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공동체로 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가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 삶의 자리에서 바른 신앙을 실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