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형목사의 사도행전 8장 1–5절 설교를 바탕으로, 스데반의 순교 이후 시작된 박해와 흩어짐이 어떻게 복음 확장의 결정적 통로로 작동했는지를 살피며, ‘참된 복음’과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에서 초대교회와 오늘의 교회가 지녀야 할 선교적 상상력을 신학적·실천적으로 재조명한다.
사도행전 8장 1–5절은 교회의 역사가 언제나 안정적인 성장 곡선 위에서만 진행되지 않았음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쓰러진 직후, 교회는 축제의 순간이 아니라 위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졌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는 이 장면을 단순한 비극의 기록으로 읽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안목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교회가 한 도시에 안착하여 성공한 종교 공동체로 굳어질 때, 복음은 쉽게 ‘정주(定住)의 논리’에 갇힌다. 그러나 성령은 그 정주를 흔들어 교회를 ‘전진의 궤적’ 위로 밀어 올리신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8장의 흩어짐은 패배가 아니라 재배치이며, 상실이 아니라 파송이고, 소멸이 아니라 확장이다.
초대교회가 겪은 박해는 단순한 심리적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예배의 공간, 공동체의 결속, 일상의 생계까지 동시에 무너뜨리는 전면적 충격이었다. 사울이 집집마다 들이닥쳐 남녀를 가리지 않고 끌어다가 옥에 가두었다는 기록은, 신앙 고백이 곧 생존의 위험을 의미했던 시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질문을 다시 꺼낸다.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의 총합이 아니라, 복음을 품은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엮여 하나의 몸을 이루는 생명체다. 그렇기에 외부의 폭력이 모임을 흩어 놓을 수는 있어도, 복음의 생명력을 말살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생명은 더 넓은 공간으로 흘러간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남았다는 사실 역시 지도력의 고착이 아니라, 중심과 주변이 동시에 작동하는 다층적 선교 구조를 암시한다.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행 8:4)는 구절은 초대교회 선교의 본질을 응축한다. 복음은 특정 직분자의 전문 기술이 아니라, 삶의 이동 경로와 생존의 여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증언이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참된 복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정의된다. 참된 복음은 위기를 회피하는 종교적 위안이 아니라, 위기의 한복판에서도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게 만드는 힘이다. 복음이 진리라면, 그것은 우호적인 환경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리한 조건은 진리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무대가 된다. 초대교회가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교회의 안전’보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에 더 깊이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박해는 단순한 악의 폭주가 아니라, 역설적인 섭리의 장이 된다. 박해 자체가 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악의 의도를 선으로 전환하시는 주권을 가지신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역사 앞에서 가져야 할 해석의 힘을 바로 여기서 강조한다. 사람의 눈에는 스데반의 죽음이 패배처럼 보였지만, 성령의 시선에서는 그 순교가 흩어짐의 문을 열어 땅끝을 향한 길을 구체화한다.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와 땅끝이라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구도가, 이 시점에서 추상적 표어가 아니라 실제 이동의 지도표로 바뀐다.
빌립이 사마리아로 내려간 사건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다. 사마리아는 오랜 적대와 상처가 축적된 경계의 땅이었다. 그곳으로 복음이 들어갔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민족적 순혈주의와 종교적 배타성을 넘어 확장된다는 선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으로 해석한다. 하나님 나라는 특정 집단의 정체성에 갇힌 프로젝트가 아니라, 대속의 은혜로 새 인류를 형성하는 보편적 통치다. 그렇기에 경계의 공간은 늘 복음의 실험장이 된다. 빌립이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표현은, 설교 기법보다 존재의 방향을 강조한다. 그는 불편한 땅을 피해 가지 않았고, 성령의 이끄심 앞에서 기꺼이 내려갔다. 그 내려감은 선교가 곧 낮아짐임을 드러낸다.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경고하는 것은, 교회가 위기가 닥쳐서야 움직이는 습관이다. 초대교회 역시 예루살렘의 부흥과 안정 속에 머물고 싶은 유혹이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성취를 곧 안정으로 바꾸고, 안정은 곧 관성으로 굳어진다. 그러나 복음은 관성에 안주하지 않는다. 복음은 늘 밖으로, 더 멀리, 더 낮은 자리로 교회를 밀어낸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기쁜 노래를 부르며 자발적으로 흩어지는 순종”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무모한 이동을 미화하자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실제적 결단으로 번역하라는 요청이다.
초대교회는 외적 박해뿐 아니라, 내적 사상 혼란과도 싸워야 했다. 영지주의나 가현설과 같은 흐름은 복음의 중심을 흐릴 위험을 안고 있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참된 복음’은 열정의 강도가 아니라 내용의 정직성과 중심의 명확성을 뜻한다. 인간 내면의 잠재력을 개발해 구원에 이른다는 사고는 십자가를 자기계발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반면 복음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건을 중심에 둔다. 형식과 플랫폼이 아무리 확장되어도 중심이 흐려지면 그 성장은 공허한 팽창에 불과하다.
이 균형은 현대 교회가 맞닥뜨린 변화의 한복판에서 더욱 절실해졌다. 팬데믹은 교회의 공간 중심 신학을 시험했고, 예배와 공동체에 대한 관성을 흔들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상황을 사도행전 8장의 현대적 반향으로 읽는다. 예배당 중심의 신앙이 제약을 받을 때, 교회는 ‘보이는 교회’에 대한 의존을 성찰하게 된다. 동시에 성령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통해 계속 일하신다. 흩어진 성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말씀과 기도, 섬김을 이어갈 때 교회는 건물 밖에서 새로운 지평을 경험한다.
그는 복음과 문화 형식 사이의 긴장을 자주 언급한다.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그 복음을 담는 그릇은 시대마다 달라질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교회는 다양한 기술을 선용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이 복음을 상품화할 때, 교회는 클릭 수와 노출도라는 논리에 종속된다. 장재형목사는 기술을 배제하지 않되, 기술 위에 군림하는 영적 주권을 강조한다. 도구는 발이 될 수 있지만, 목적지는 복음이 결정해야 한다.
사도행전 8장의 흩어짐은 제자도의 성격도 새롭게 규정한다. 안정된 중심에서 배우는 신앙은 지식에 머물기 쉽지만, 흩어진 자리에서의 신앙은 삶의 전장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제자훈련을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복음이 체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성도는 각자의 일상에서 작은 교회가 된다. 가정과 직장, 온라인 공간이 곧 예배와 증언의 현장이 된다.
그의 설교가 돋보이는 지점은 개인 구원의 감격을 역사적 전망과 연결시키는 데 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 위로를 넘어, 창조에서 새 창조로 이어지는 거대한 서사의 한복판에 서 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변혁의 소망을 낳는다. 사도행전 8장의 흩어짐은 바로 그 변혁의 한 장면이다.
렘브란트의 「성 스데반의 순교」가 자주 언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화면을 가르는 빛과 어둠은 폭력과 영광이 교차하는 순간을 압축한다. 스데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빛으로 이어지는 문이 된다. 교회 역시 돌에 맞는 자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피는 씨앗이 된다.
오늘의 교회가 이 정신을 이어가려면, 무엇보다 복음의 중심성을 회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내주,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핵심이 분명할수록 교회는 형식의 변화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중심이 흔들리면 가장 전통적인 형식조차 공허해진다.
또한 흩어짐을 두려움이 아닌 소명으로 읽는 훈련이 필요하다. 장재형목사는 모든 성도를 ‘보냄받은 자’로 이해하는 선교적 교회론을 강조한다. 교회의 역할은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충전해 세상 속으로 보내고 다시 연결하는 것이다.
결국 사도행전 8장 1–5절은 위로이자 경고이며 전망이다. 박해는 복음을 끝내지 못하고, 안주는 교회를 흔들 수 있으며, 흩어짐은 확장이 된다. 장재형목사의 메시지는 변동성과 불확실성 속에 선 교회에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전하려 하는가. 지켜야 할 것은 복음의 중심이며, 전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소식이다. 이 두 가지가 분명할 때, 교회는 어디서든 동일한 성령 안에서 동일한 복음을 증언한다. 스데반의 눈물 뒤에 사마리아의 기쁨이 있었듯, 오늘도 눈물의 자리에서 복음의 새 길은 시작된다.